그가 해주는 말이다. 앞뒤 문맥은 없다. 내가 불안해 보이거나 갑자기 감정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싶으면 안심시켜 주듯 얘기한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 사람이 진짜 나를 알고 하는 말일까 의문이 솟다가도 문장 자체만으로 일단 후우 하며 숨을 내뱉어본다. 의심은 뒤로 하고 일단 오롯이 이 순간을 음미하자고 결심한다.
오은영 박사님이 성인애착유형 테스트를 방송에서 언급하신 후, 인터넷에서 테스트를 찾아 해 봤었다. 방송에 처음 나왔을 당시나 지금이나 결과는 같다. 불안정애착 혼란(공포회피형). 이렇게 긴 단어를 외우고 있었던 건 아니고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부정-타인부정.
부정+부정. 나도, 너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대체 나란 인간은 왜 이렇게 생겨 먹은 걸까?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결과를 보니 좌절감까지 드는 듯하다. 아니다. 어쩌면 이건 뿌리 깊은 문제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은 결과가 오히려 논리적일지도.
최근에 그가 한 말이다.
"너는 선명하면서도 미스터리해."
난 웃으며 되받았다.
"어쩔 수 없어, 그 두 개 모두 다 나야."
그러곤 문득 이 짧은 대화를 혼자 곱씹다 성인애착유형 테스트를 재검사해본 거다.
연애를 시작하며 자아 탐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가 자꾸 질문하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 앞에서 원하는지 아닌지, 기분은 어떠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묻는다. 반복되는 질문에 생각 훈련을 받는 것만 같다.
누군가와 사귀며 외부적인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의 문제가 둘 사이 균열을 조금씩 만들어 낸다. 이 이상함을 이젠 받아들이기로 한다. 연애 초반 그에게 문득 말했다.
"내가 말이야.... 사실... 자주 도망치고 싶어져."
회피 성향을 꺼내 보인 거다.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한편으론 꾸며진 모습을 내리고 진짜를 보여 시원했다. 사실 이건 네가 좋다는 말이었다. 아직 서로에 대해 깊이 모르지만 너와 함께 잘 헤쳐 나가고 싶다는 내 언어의 고백이었다.
지금의 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내 안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아니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코딩되어 있는 걸까. 그래서인지 그는 내가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 살펴 준다.
"넌 혼자가 아니야." 이 또한 그가 자주 해주는 말이다. 가급적 나 혼자 처리하려고 하고, 도움은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일관하는 나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본인이 곁에 있을 거라고 자꾸만 알려준다.
'그렇겠지. 그렇겠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말줄임표가 따라붙는다. 그래도 이젠 안다. 이건 그를 온 맘으로 믿었다가 혹시 모를 미래의 상처에 대해 미리 두려워하는 마음일 뿐이라는 것 말이다.
다음번에 이 테스트를 화두로 고민을 털어놓아볼까 싶다. 그리고 결과지에 적힌 문장들을 그에게 읽어줘야겠다.
"나도 너와 가까운 관계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남을 믿거나 의지하는 게 어려워. 그래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져."
"나도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어. 사실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그리고 너의 애정 어린 정성을 느끼고 있어. 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