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고 싶을 때, 그리고 더는 하지 못할 것 같을 때
날이 많이 풀린 것 같아, 한강이나 뛰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걷거나 혹은 따릉이를 타고서는 자주 간 곳이지만, 막상 뛰어본 기억은 없다. 무릎이 아프다는 근사한 핑계가 있기도 했지만 (이럴 때는 거의 중증 환자지), 무엇보다 가까이에 있다 보니 다음에..로 미루는 것이 무엇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잠깐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미루다 가는 평생 한강 러닝을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찾아보지 않고 외투를 여러 겹 껴입고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신발도 채 신지 않고 뒤꿈치를 욱여넣으며 집 밖으로 쫓겨나듯 나왔다.
그래도 겨울은 겨울인지라 계절감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차림새가 살짝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시 들어가자 정도의 추위는 아니라 일단 뛰어보기로. 모르는 길인 데다, 밤이라 살짝 무섭기도 했지만 한 발자국을 뗀 이후는 그 이전에 비해 훨씬 수월한 일들이었다.
완벽주의자들이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꽤나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많은 일들을 머릿속에만 가두어두고, 몸은 더욱더 게을러졌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시작을 자꾸 미루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 이상한 완벽주의를 채 버리지 못하여 일단 '해버리는 일'이 나에게는 몹시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었다. 오늘에서야 모든 환경이 갖추어지기를 바라고, 이것 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는 중압감이 시작을 자꾸 미루는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일단 머릿속을 비우고 그냥 하기로. 5초는 너무 긴 듯하고, 딱 3초만 세고 앞 뒤 따지지 않고 하기로 했던 것을 그냥 해버리기로 했다.
어렸을 땐 그래도 달리기 선수도 하고 나름 헬스장에서도 열심히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내 두 발로 모든 육신의 무게를 이기며 속도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애플 워치의 '실외 달리기' 기능에서, 이 기능을 켠 이후 20분은 달려야 합니다.라는 약간의 강박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평소와 같이 빠르게 걷다 돌아왔을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류의 규칙은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라, 애플 워치가 하라는 것이 곧 법인 사람처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강바람에 얼어붙은 귀와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조금만 뛰다 보면 금방 더워질 것 같기도 해서 일단 뛰어보기로 했다.
막상 뛰기 시작하자 마치 몸이 기억이라도 하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살짝 기울인 상태에서 무릎에 최대한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뒤꿈치부터 지면에 닿기 위해 노력하자 러닝머신 위에서는 느낄 수 없던, '내 힘'으로 달린다라는 기분이 들었다.
무릎이 좋지 않아 (이렇게 또 연장 탓을 해봅니다) 빠르게 달리지는 못했지만, 사람이 적은 한적한 강가를 달리는 것은 실내에서 멍하니 휴대폰 액정을 보며 달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몸을 쓴다는 감각, 그리고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
오오, 나 꽤 달리는데?라는 순간은 3초였나, 순식간에 지나쳐버리고 이내 숨이 가빠오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순간 심박수를 보자 러닝머신의 일정한 레일 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목표로 한 20분에서 딱 3분 정도 모자란 17분 정도를 달린 후였다.
그래, 목표로 한 20분만큼은 달리자.
몇 번을 힐끔거리다 목표한 20분이 되었다. 물을 먹으면서 이제쯤 천천히 걸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제는 멀어진 사이가 되어 버린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푸시업을 하며 딱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그만하고 싶을 때, 더해야 근육이 생긴다며 몇 번을 더 해내고는 더 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이 말이 생각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딱 3분만 더 뛰어보자 싶었다. 사실 3분을 더 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3분을 넘어 달리자 소위 말하는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서 인지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요즘 답을 찾지 못해 어둑한 바다의 깊숙한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어렴풋이 답을 찾은 것 같다는 느낌으로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 내가 한계라고 생각하는 순간 혹은 목표에 도달한 것만 같은 그 순간.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만 눈 딱 감으면 그때 무언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