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즈미 Mar 01. 2020

스스로가 작다고 느껴질 땐 반야(banya)를.

러시아에서 20초만 미쳐볼까

20초만 미쳤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 봐. 
상상도 못 할 일이 펼쳐질 거야.
                                                                                       -영화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



Sanduny (산두니)


모스크바에는 1808년부터 지금까지 영업 중인 전통 사우나가 있다. 이름하야 '산두니'. 심지어 나폴레옹도 이용했단다. 횡단 열차 타기 전 뽀송하게 씻을 요량으로 일정에 포함시켰다.

출처: Google


러시아식 사우나는 반야라고 한다. 사우나 방에 들어가면 직원이 화로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퍼 넣는다. 그 증기로 사우나를 한다. 젖은 자작나무로 몸을 탁탁 두들겨서 노폐물을 빼내기도 한다. 원래는 차가운 호수나 욕조 물에 뛰어드는 것까지가 전통인데, 타지에서 심장마비 걸려 죽고 싶진 않으니 절대 안 할 생각이었다.


어쩐지 발레단 연습실 같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면 바로 대기실이 나온다. 따로 락커 없이 여기서 사우나 복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남탕과 여탕 건물 자체가 다르니 별 걱정은 없다.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다가 곧 있으면 사우나가 시작된다는 말에 사람들을 따라 들어갔다. 



사우나 방 맨 위층에 누웠다. 또래 러시아 친구들이 들어와 날 보더니 처음이냐고, 조금 아래쪽 계단이 나을 거라며 자기들 옆자리로 오란다. 문이 닫히고 직원이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 이런 거 꽤 잘 버티는 편인데 싶고 그 친구들도 오 너 괜찮네? 하길래 자신 있게 한 계단 올라가 앉았다. 


갑자기 화산에 머리를 처박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죽도록 뜨거워서 몸에 두를 수건과 모자가 필수였구나? 즉시 다시 내려갔다. 다들 웃었다.


지옥의 불구덩이 같은 곳에 다닥다닥 함께 앉아있으니 저절로 동지애가 생긴 건지 그 친구들과 제법 말을 텄다. 몸이 데워지면 꼭 밖에 있는 차가운 욕조에 들어가 봐야 한단다. 다들 나가는 모습을 보니 죽기 전에 또 하겠냐 싶어서 폭 뛰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몸이 쇠처럼 단단해지면서 손끝까지 세포가 다 열리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강철 인간을 만들기 위해 몸속에 뭔가를 주입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눈을 감고 얼굴까지 푹 담그고 약간은 어정쩡하게 나왔다. 강하고 준비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걸 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괜찮다, 이거.

출처: Google. 실제로는 작은 욕조에 뛰어들었음.



여기서 재밌는 건,

모스크바행 비행기에서 읽은 책이 하필 <J.M. 배리 여성 수영클럽>이었다. 한겨울 런던의 차가운 연못에서 수영하는 할머니들이 나오는 소설이다. 여행길에 읽은 소설을 여행지에서 직접 경험하다니. 짱이야. 그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당당한지 조금 더 이해가 됐다.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오늘 넷플릭스를 뒤지다가 <기네스 펠트로의 웰빙 실험실>이라는 다큐를 알게 됐다. 2편 '차갑게 더 차갑게'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차가운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자율신경계를 정신력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서 플라시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아저씨가 자꾸만 사이비처럼 들려서 처음엔 실눈 뜨고 봤다. 하지만 곧 그냥 유쾌해졌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즐겁게 살 수 있다면, 떨리는 목소리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할 만큼 누군가에게 진실된 경험이라면 감히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내가 모르는 세상은 너무 많으니까. 숨겨진 세상은 흥미진진하니까.



아마 또 러시아에 가고, 또 반야를 할 거다. 그땐 호수에 뛰어들어볼까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끼 주면, 한 끼 갚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