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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Oct 08. 2018

터키, 파묵칼레

여행길엔 오싹한 이야기들이 떠돌아다닌다. 인도(였던 걸로 기억한다)를 여행하던 신혼부부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아내만 태우고 달아나 어딘가에 팔아버렸다는 고전 같은 얘기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들었던 "내가 아는 사람이 당했는데"라고 시작하는 각종 사기, 소매치기 얘기들. '설마'라고 생각하면서도 악명 높은 길을 지날 때면 신경이 곤두섰다. 휘파람을 불다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는 얘기가 떠올라 찝찝함에 멈추게 되는 것처럼.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로 갈 때도 그랬다. 이 길에선 종종 사람들이 납치된다고 했다. 밤에 카파도키아를 출발한 버스가 데니즐리 터미널에 도착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사히 파묵칼레까지 갈 수 있을까. 


버스에서 내려 짐을 받아 들자마자 누군가 다가와 “파묵칼레?”라고 외치고는 순식간에 내 가방을 낚아채려 했다. 반사적으로 캐리어를 몸 쪽으로 바짝 당긴 뒤, 도망치듯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 구간에서 비몽사몽간에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꾀어 차에 태운 뒤 엉뚱한 숙소 앞에 내려주고 협박하며 비싼 숙소비용을 요구하는 사기가 횡횡한단 얘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오전 5시 30분, 첫 차는 오전 7시였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자리에 앉자 긴장이 풀렸는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때, 그 아저씨가 또 다가와 “파묵칼레”를 외쳤다. 묻지도 않았는데 "비용은 5 리라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니까 믿어도 돼"라고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 말에 걱정이 사라질리는 없지만 슬슬 주위가 환해지는 걸 보니 불안감도 조금씩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피곤함이 공포를 때려눕혔다. 아저씨를 따라나섰지만,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단 호의만큼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승합차엔 딱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아마도 아저씨는 내가 이 승합차를 탈 수밖에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꽉 채워 떠나고 싶은데 남은 관광객이 나뿐이니,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심정으로 터미널에서 날 찾아다녔을지도. 아무튼 버스는 한참을 달려 ‘코이레 호텔’ 앞에 섰다. 파묵칼레를 여행하는 사람들 후기에서 많이 봤던 곳이었다.      



파묵칼레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석회봉 개장 시간 전이라 골목에 사람도 문을 연 가게도 없었다. 호텔 로비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나와 한참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여유를 부렸는데도 1등으로 매표소 앞에 도착했다. 나보다 늦게 도착한 직원은 느긋하게 오픈 준비를 하고는 8시를 1분 남기고 내게 표를 팔았다.      


신발을 벗고 하얀 땅에 발을 디뎠다. 석회층인 걸 알면서도 발을 내려놓을 때 구름 덩어리 같은 몽실몽실한 촉감을 기대했다. 실제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악 소리를 내야 했지만. 설원 같기도 건기의 우유니 소금사막 같기도 한 하얀 세상이었다. 하얗기만 했다. 에메랄드빛 물이 층층이 고여있어야 하는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딘가에서 파묵칼레 온천 난개발로 물이 점점 마르고 있다는 글을 본 게 떠올랐다. 



조금 더 올라가면 있겠지 생각하며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다. 걷는 내내 본 거라곤 졸졸 흐르는 한줄기 물뿐이었다. 발 담글 곳 하나 없다 보니 싱겁게 석회봉 탐험이 끝나버렸다. 


꼭대기엔 온천 덕에 흥했던 도시, 히에라폴리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원전 1800년쯤 세워져 13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는 도시다. 1354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원형극장이다. 지금까지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건 원형극장뿐이다. 아폴론 신전, 아고라 등은 표지판으로만 짐작해볼 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과거엔 온천 때문에 흥했다지만 이젠 온천 때문에 더 소외된 곳처럼 느껴졌다. 관광객들은 이곳까지 올라오지 않는 듯했다. 건물과 건물을 이동할 땐 무성한 풀을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황톳빛 돌무더기와 풀빛의 단조로운 풍경.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양귀비만이 황량함에 활기를 더했다. 



한 바퀴 휘 돌고 내려오니 석회봉이 내가 알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수량을 관리(?)하는 모양이다. 하얗고 파랗기만 한 평온한 세상에 알록달록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그 속에 나도 슬며시 끼어들었다. 오를 땐 거침없었지만, 내려갈 땐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물에 발을 담그고, 셀카를 찍었다 풍경을 찍었다를 반복했다. 내려가는 내내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찍은 내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호의를 베푼 사람들 덕에 전신사진도 꽤 건졌다. 온천에 신체뿐 아니라 마음의 힐링 작용도 있는 모양이다.


여길 또 언제 와볼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왔을 때 여긴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매번 여행지를 떠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파묵칼레에선 좀 더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따로 탈의실이 없지만 사람들은 옷 안에 수영복을 입고 와서 온천을 즐긴다. 인피니티 풀이 떠올랐던 파묵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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