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의미부여
한국인에게 베를린은 큰 의미를 갖는 도시다. 시내 곳곳에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 흔적을 따라다니다 보니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휴전선 철책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한때 동서를 가로질러 영원할 것처럼 서있었을 차가운 콘크리트 벽 앞에선 자연스럽게 실향민들이 떠올랐다. 북한 핵실험엔 더 이상 눈 하나 꿈쩍하지 않지만 이산가족상봉 때만 되면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언젠가 38선도 전쟁의 참혹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역사적 장소로 세계인들을 불러 모으는 '관광지'가 될 수 있을까.
일본과 과거사에 대한 인식 차이로 충돌할 때마다 한국은 독일을 떠올린다. 독일은 꾸준히 과거의 잘못을 사죄해왔다.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3년 독일 바이에른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았고, 2년 뒤 수용소 해방 70주년을 맞아 열린 기념식에도 참석했다. 기념사에서 메르켈 총리는 "(많은 이들이) 나치와 생각이나 신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며 "우리는 희생자들을 위해, 또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과 행동이 모든 독일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선거를 앞둔 '이벤트'성 행보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의 이러한 자세는 자국민들이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에 분명 영향을 미친다. 또 주변 국가에 독일이 과거를 잊고 있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탄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정부가 나서 역사를 부정하고 역사교육마저 왜곡한다면 다음 세대는 주변 국가와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왜곡된 역사가 진실이라고 믿는 이들에겐 '진짜' 사실에 기반해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생떼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강제수용소 노역과 위안부 피해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의 이미 협정을 통해 적절한 보상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질 부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 제기하는 이들을 오히려 파렴치한으로 몰기도 한다. 설령 일본 주장대로 사과와 보상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사죄는 단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함께 했다. 베를린 상징과도 같은 이곳은 늘 관광객들로 붐빈다. 여기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진회색 정육면체 조각들이 삐뚤빼뚤 가득 놓여있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나온다.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후미진 곳이 아닌,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축물 근처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인근에 추모공간을 만들었다.
관 같기도 하고 감옥의 창살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조각들 사이를 거닐었다. 무한도전에 나와 반향이 일었던 '군함도'가 생각났다. 군함도는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본은 당시 첨단 기술이었을 철강, 조선, 석탄 시설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발전 이면의 어두운 면은 감추기에 급급하다. 1940년대 이곳에 끌려와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쉬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스러져간 조선인에 대한 사죄와 추모의 글,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긴 한가??)
슈톨퍼슈타인 이야기
베를린 거리 곳곳에 설치돼있다는 손바닥 반만 한 금속판을 찾아 거리를 걸을 때면 계속 시선이 바닥으로 쏠렸다. 며칠 동안 허탕을 쳐 포기하던 차에 우연히 유대인 여학교였던 건물 앞에서 하나를 발견했다. '슈톨퍼슈타인(걸림돌)'이라 불리는 이 조각은 나치가 삶을 앗아간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을 기리기 위해 제작됐다. 조각가 군터 뎀니히는 여기에 희생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추방 날짜 그리고 어디에서 생을 마감했는지 등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곳 인근에 설치했다. 길을 걷다 이 조각이 발에 걸릴 때면 과거를 한 번씩 되새기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짜 독일 사람 개개인의 속내는 알 수가 없다. 베를린 장벽,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슈톨퍼슈타인을 보면서 매번 과거 일들을 떠올릴 것인가. 어쩌면 이것들을 처음 본 여행자만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슈톨퍼슈타인이 눈에 띌 때마다 사진을 찍고 유심히 살펴보며 읽지 못하는 글자들에서 뜻을 유추해 그 사람의 삶을 떠올려보는 건 여행자의 일이지 이곳에 사는 이들의 일이 아니다. 독일 사람들은 길을 걷다 갑자기 우두커니 서버린 나를 피해 길을 가기 바빴다. 그들에겐 매일 지나가는 길에 불과할테니까. 일상 속에서 매번 특별함을 느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주변에 이런 공간들이 있어 가끔은 나 같은 관광객을 보면서 '쟤는 저기서 뭘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한번쯤은 역사책에서 배웠던 것들을 되새김질할 수도 있지 않을까.
@통일이 된다면 우리는 벌어진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개인과 사회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