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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k Apr 09. 2017

세비야 '매듭'의 의미는

야간버스를 타고 세비야로 넘어왔다. 잠에 취해 있다 급히 내리느라 하마터면 노트북을 두고 갈 뻔했다. 버스로 되돌아가니 기사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정신을 차리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차가운 공기에 절로 잠이 깼다. 모두가 잠든 새벽, 캐리어 소리는 유독 크게 들렸다. 돌이 깔린 좁은 골목길에선 더욱 그랬다. 다른 이의 단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배로 신경쓰며 가방을 끌었다.


호스텔 직원은 체크인 시간 한참 전 도착한 여행객이 익숙한 듯 휴게 공간을 안내했다. 이어 "아침을 먹고 워킹투어를 다녀오면 딱 체크인할 시간이니 좋을 거야"라고 말했다. 소파에 철퍼덕 앉아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켜고 있을 때 직원은 다가와 "아마 좀 추울거야"라며 담요를 건넸다. 도착 5분 만에 호스텔 라운지는 내 아지트가 됐다. 담요를 두르고 노트북으로 밀린 드라마를 한창 보고 있을 때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드라마 두 편을 끝내고 동이 튼 거리로 나섰다. 초록 잎들 사이 주홍색 열매가 신기했다. 나보다 얼마 큰 것 같지 않은 나무들이 길에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따먹을 수 있는 높이에 오렌지가 가득했다. 바닥엔 저마다의 이유로 떨어진 오렌지들이 굴러다녔다. 오렌지란 본디 마트 진열대에 질서가 없는 듯 있게 무더기로 쌓여있는 게 아니던가. 감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벚나무가 아닌 가로수여서가 아니라 오렌지 나무가 가로수라서 자꾸만 눈이 갔다. 햇볕이 잘 드는 스페인을 닮은 가로수란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만큼이나 '매듭'모양도 자주 보였다. 실타래같기도 무한대를 90도 회전시킨 것 같기도 한 모양이 들어간 'NO&DO'란 문양은 상하수도 뚜껑에도, 볼라드에도, 거리에 붙은 포스터에도 새겨져 있었다.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잡고 묻고 싶은 심정. 책을 뒤적였다. 13세기 카스티야 왕국 왕이었던 알폰소 10세가 내린 상징이 지금 세비야의 상징이 된 것이었다. 당시 맏아들 페르난도가 죽자 또 다른 아들 산초 4세는 조카인 페르난도의 아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려 했다. 알폰소 10세는 이슬람 세력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세비야는 끝까지 그를 지지했다. 숨을 거두기 전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 'No ma dejado(노 마 데하도)'란 상징을 하사했다.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난해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산 책이 세비야에 와서야 빛을 발했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여행을 위해 책을 구매했지만 책에서 두 도시 이름은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스페인 남부의 세비야, 그라나다, 톨레도 등 낯선 도시들만 반복됐다. 이번에 안달루시아를 여행하면서 책에서 봤던 유적들과 이야기들이 비로소 내 것이 되었다.


세비야는 16세기 '유럽의 수도'로 불렸다. 과달키비르를 통해 교역한 물자가 모여 들었고 돈도 사람도 흘러 들어왔다. 또 이슬람 세력 지배의 영향으로 다른 유럽에선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혼재된 독특한 문화 유산을 자랑한다. 승리의 광장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이 모든 특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과 히랄라탑, 인디아스 고문서관 그리고 알카사르를 둘러보면 세비야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읽힌다.


우뚝 솟아 있어 멀리서도 눈에 띄는 히랄라 탑은 세비야를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 알모아데족의 작품이다. 자신들의 위대함을 뽐내기 위해 알모아데족은 벽돌을 쌓아 올려 첨탑을 지었다. 건축에 필요한 재료는 세비야 옛 건물을 부숴 마련했다. 탑 아래 쪽과 위쪽은 사용된 재료가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아래 쪽은 주로 로마 시절 건축물을 해체해서 지었다고 한다. 그 옆엔 모스크를 지었다. 하지만 13세기 스페인 세력이 다시 이곳을 정복한 뒤 모스크를 부수고 대성당을 지었다. 짓는 당시에도 "건축 과정을 보는 이들이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할 만한 교회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건축 설계위원이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다. 히랄다 탑은 모스크가 사라지는 중에도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살아남았다. 다만 꼭대기 돔이 제거되고 종탑이 설치됐다.


대성당 안 콜럼버스의 묘는 대항해시대의 화려함과 인간의 탐욕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그의 관은 바닥에 놓여 있지 않고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나바라 왕이 네 귀퉁이를 들고 있는 형태로 제작돼있다. 이는 "내 시신은 신대륙에 묻어달라. 내가 다시는 이곳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게 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르 것이다.


콜럼버스는 첫 번째 아메리카로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2~4차 항해를 떠났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러 명으로부터 자금을 모아 항해를 떠났기에 투자자들에게 남겨줘야 했던 콜럼버스는 신대륙에서 황금 채굴을 위해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를 지지하던 이사벨 여왕이 죽은 뒤엔 입지가 더 좁아졌다. 이에 콜럼버스는 다시는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신대륙에 묻혔던 그의 시신은 신대륙들이 차례로 독립하면서 결국 세비야로 돌아오게 됐다.


성당 맞은편 인디아스 고문서관은 본래 무역관 건물이었다. 안엔 경매장도 있었다. 무역이 활발하던 시기 상인들은 과달키비르 강 습기 때문에 물건이 상하자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물건을 보관할 수 있고 비 걱정 없이 교역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성직자들은 신성해야 할 교회로 상인들이 몰려들자 왕에게 이들을 위한 독립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세비야 대성당과 히랄다 탑



@그라나다에 있는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산타페 협약 장면을 그린 동상.




알카사르는 유럽 궁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이 처음 이곳을 요새로 지었다 9세기 궁전으로 개조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기독교 세력이 세비야를 탈환한 13세기 지어졌다고 한다. 이슬람 색채를 지우고 새로운 궁전을 지울 법 한데 페드로 왕은 남아있던 무어인들을 불러 궁을 짓게 했다. 이슬람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유다. 호박이나 황금 등 보석으로 건물을 치장하지 않았지만 벽면과 천장, 문 아치를 이루는섬세한 조각과 색색깔 타일이 건물에 화려함을 더한다.


세비야를 둘러보며 다음 여행지들이 더 기대됐다. 알카사르를 보며 앞으로 보게 된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가, 히랄다 탑과 꼭 닮았다는 마라케시의 코르도바 모스크가 기다려졌다.




@알카사르


@에스파냐 광장
@에스파냐 광장
@에스파냐 광장



*참고

<유럽의 첫 번째 태양, 스페인> 서희석, 호세 안토니오 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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