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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이 Apr 25. 2022

그대를 안다는 눈빛만으로도

성격유형이 필요한 이유

  어느 날, 사무실에 건강 음료를 파는 영업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서로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지기는 싫어서 고개를 숙이고 짐짓 더 열심히 일하는 척을 했다. 어떤 이는 필요 없는 물건을 사라고 종용하거나 불필요한 카드 서비스에 가입하기를 권유받으면 한참이나 거절을 하다가 문득 “허락받고 들어오셨어요? 코로나 시국에.”라는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소심한 나로서는 그저 나에게 말을 걸지 말아 달라는 소망을 담은 채로 모니터만 뚫어지게 바라보곤 한다. 그가 전단지를 들고 내게 가까이 오는 걸 시시각각으로 눈치채면서도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이. 사회생활 N년차에 접어들기 때문에, 그리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통해 이미 만들 수 있는 신용카드는 거의 다 있고 살 만한 물건들도 미리 사서 집에 쟁여놓은 게 넘쳐흐른다. 때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있어요.”라고 거절을 한대도 거절을 위한 까칠한 거짓말도 아니다. 다만 그건 곤란함을 덜어내려는 나의 회피방법이다.


  하지만 그날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불청객처럼 찾아오신 건강즙 아주머니는 뭔가 좀 다르기도 달랐다. 건너편 직원에게 다가가 딱 처음 얼굴을 보자마자 아주 빠른 말투로 “아가씨는 위, 자궁이 안 좋아. 이걸 먹어야 돼.” 하며 겉봉투에 ‘브로콜리 OOO’, 또는 ‘양배추 XXX’라고 적힌 샘플 음료들을 내밀었다. 곧 이어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소음인은 폐랑 장이지.”하며 한방학적 체질을 제시하셨다.


  과거에 한약방에 쫌 다녀본 나는, 한방에서 제시하는 네 가지 구분에 대해 겉핥기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의외라서 건너편 동료에게 참지 못한 채 말을 걸고 말았다. “어이, 지원 씨가 소음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거기부터가 문제였다.


  아주머니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시더니, “아니, 자기 말이야. 여기 이 아가씨는 소양인. 그대가 소음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 내리깔고 음흉해.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못 한다. 비염 알레르기 있지?”라며 줄줄 읊기 시작하셨다.

  “아니요? 저는 비염도 없고 알레르기도 전혀 없는데요.”

  “곧 생겨.”


  아니, 이게 무슨……. 정도가 있지. 영업하시려고 사람 잡으시겠네. 슬슬 불쾌해질 무렵이 되어 고개를 다시 모이를 찾는 병아리처럼 모니터로 처박으며 후회를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빠른 랩 실력으로 말을 놓지 않고 시연하셨다.

  “대신 좋은 점도 있어. 머리가 좋고 목표한 일은 딱 이뤄내. 체력이 뒷받침이 되질 않아서 힘들겠지만 머리로 그걸 이겨내."

  내가 말이 없자 이내 "건강즙 비용을 일 년 치 모으면 부담되는 돈일 수 있지만 내가 60대야. (마스크 내려 동안 인증 후) 이 나이 되니까 돈은 어느 정도 저절로 모이더라구. 댁 같은 사람들은 건강에도 투자해야 돼.”


  음. 내 마음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곱씹을 시간이 잠시 필요했다. 아주머니의 말은 나의 어딘가 정확하지 않은 마음 한구석을 쿡 건드렸다.

-내가 음흉해? 나는 사람 파악을 잘하는 거지. 그게 틀릴 수도 있으니 입을 다무는 것 뿐이야.

-체력이 안되긴 해. 피부가 거칠지.

  평소 잠이 부족하고 퀭한 내 얼굴을 떠올렸다. 뭔가를 한다고, 그러니까 남들이 볼 땐 돈도 안나오고 티도 안나오는 뭔가를 긁적거린다고 그랬다. 일하고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모니터 앞에서 자판만 치다가 잠든 적도 있기는 했다.

  

  돈도 돈이었다. 건강에 투자하자고 날 위한 음료 마시기에 한달에 4만 원은 저렴하기도 비싸기도 했다. 모든 운동들이 그렇듯이, 해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퇴로를 모색하게 되는 그런 비용이었다. 앞뒤 없이 들으면 60대가 되면 자산은 모이나 보다 싶었지만 한켠으로는 건강즙은 안 먹고 전전긍긍 모아야 일명 시드머니가 싹을 틔울 것도 같았다. 이 분은 나의 그런 고민마저 알아차리고 이런 말씀을 한 것인가? 나는 진정 건강에 투자해야 할 정도로 바짝 곯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시의 상념 끝에, 결론을 지었다.


 -저분 맞는 말인 거 같아……. 아아, 나는 그런 사람 맞는 거 같아아아아아.


  사람을 유형으로 파악한다는 건 거칠고도 효율적인 방법이다. 누구와 친해지기 전에 요즘은 MBTI를 물어보지만 과거에 때로는 혈액형이었고, 때로는 별자리였다. 유형으로 상대방을 파악하고자 하는 이 습성은 연애를 시작할 무렵에 늘 폭발했다. 돌아보면 다소 바보 같은 일이었고 그때도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누군가가 좋아질 때면 으레 겁이 덜컥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일까? 우리에게 미래를 함께 할 시간이 주어질까? 결국엔 상처만 남기는 쓸모없는 두근거림이 아닐까? 내가 추구한 방법은 빠르고 간편하면서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내 마음을 제법 숨겨주었다.


  내가 이루어낸 세계를 깨뜨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자주 나타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런 사이가 아닌 깊이 있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유발될 수밖에 없다. 이 갈등은 당연하게도 상대방과 보조를 맞춰가며 서로를 알아갈 때 해소되겠지만, 높디높은 갈등의 파도를 넘어 푸르른 바다를 보기까지 그이가 곁에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 불안함을 해소하려면 이유가 필요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는 편견이자 고정관념이 편하게 여겨지는 날도 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새로운 프로그램 개시에 맞춰 적절한 고정 패널을 물색하는 것처럼, 적임자를 물색할 때면 해당자가 어떤 사람인지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 서로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몇십 명, 몇백 명이 동시에 일하는 상황에서 캐릭터가 나타나는 편이 상대편에게도 안심을 준다. 새롭게 주어지는 문제 상황에서 저 이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다면 미지수보다는 예측이 가능한 쪽이 낫다. 설사 예측이 어긋날지 모른다. 플랜 B, 플랜 C까지 세우더라도 적어도 얼마큼 나의 패는 쥘 수 있다.


역으로 스스로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격유형이 필요하기도 하다. 좋건 나쁘건 간에 소음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나를 집어넣은 후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쉬워진 것처럼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아~아주 인내심이 많고, 다정하며, 겸손하며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무척 좋아하는 성향이야."라고 평온하게 말할 수는 없고, 대신 좋은 점을 뭐라고 에둘러 센스 있게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그 대신 MBTI를 읽으며, 내 별자리가 설명하는 나를 읽으며 나라는 사람에 관한 멋진 키워드들을 발견할 때 나는 너무 좋다. '열정적인, 호기심 많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솔직히 말해 열정은 다소 부족하고 과거를 자주 돌아보는 사람이지만, 출처를 알기 어려운 별자리 점성술에서 이렇게 말해주기만 한다면 20% 퍼센트 정도만큼의 자질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기분을 유지하면서 처음보는 사람에게도 자신 있게 내 유형을 답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성격유형 검사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타인이 제시한 잣대에 자신을 대어보며 단어가 보여주는 특성의 비율이 내 안에 얼마나 내재되어 있는지 확인하며 나에 대해 알아간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은 거울 속의 저 사람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는 것만큼 한 사람에게 재미있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나만 알고 있었던 애매한 지점을 제삼자가 딱 짚을 때의 쾌감은 등의 간지러운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서 긁을 때의 기분만큼이나 만족스럽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유독 자기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에게 약하다. 자신을 이해하고픈 욕구, 타인을 이해하고픈 욕구, 서로에게 개운하게 이해받고 싶은 욕구들을 간직한 채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무수한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시간이 10분만 더 있었다면 건강즙을 결제하고 갈 수 있는데. 귀가 솔깃할 무렵 마침 오후 4시. 미팅 스케줄이 있었다. 나는 약간의 아쉬움을 삼키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진심을 담아 생각해보고 연락드리겠다며 광고지를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주머니는 "나중에 한다는 사람이 하는 거 못 봤다."며 천천히 걸어 나가셨다. 지쳐 보였다.


실은 아주머니는 거기서부터 나라는 소음인을 잘못 보셨다. 나는 마음에 담아둔 걸 놓치지 않고 천천히 생각했다가 결국 결제하고 마는 소비성 성격 유형이다. 심지어는 마음에 들자마자 앞뒤 안 가리고 즉시 결제하기도 하는 성격 급한 타입이다. 갑자기 나는 요술에서 풀려난 개구리처럼 정신이 든 것도 같았다. 첫눈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양자리이자 ISFP이자 소음인이 결합된 복잡한 타입이다. 나 같은 사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람의 미래가 체질에 달려 있을 리는 내 주제에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쓸쓸하게 아주머니가 걸어갔던 복도를 뒤따라 걸어갔다. 미팅이 끝나면 잠시 걸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건강을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아봐 주길 바랐던 내 욕구를 바라보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했다. 소비지향적인 프레임을 한 꺼풀 벗겨낸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몰랐지만 곧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 누군가에게 마구 들키고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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