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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태태 Feb 16. 2020

슬픔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

슬픔을 정확하게 위로해 준 사람들 



슬프고 힘들어 죽겠다. 계속 힘들어도 힘들 수 있고, 계속 슬픔을 이야기해도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올해 나는 서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 10대 때도, 20대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언제나 슬픔이 가득했다. 가족과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심한 건 너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장 슬픈 일이었기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최근처럼 힘내라는 메시지 위로한다는 메시지를 살면서 이렇게 많이 받아 본 적이 없다. 그중에는 나의 슬픔을 정확히 위로해주는 말도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타인의 고통을 그저 우수개 소리로 말하던 사람도 있었다. 상상할 수 없겠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려 본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는 '슬픔' 그 자체와 '슬픔'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해지는 과정, 슬픈 한 사람의 삶이 어떤지, 그 주위 사람들은 어떤지 혹은 슬픔을 나눌 수 없는 사람은 어떤지에 대해 나온다. 슬픔을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는 인간관계 처세술이 아니다. 슬픔을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자신의 슬픔이 어떤지 말한다. 이 책이 내가 갖고 있는 슬픔을 온전히 감싸 안아 준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해줄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의 슬픔을 이해해주기 위해서는 그 슬픔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 슬픔이 상대에게 어느 정도의 슬픔인지, 어떤 상처와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만 정확하게 위로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슬픔을 이겨내면서 잘 살아라 라는 텅 빈 위로만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슬퍼하는 상대에게 당신의 앞날을 준비하세요, 자신이 잘 사는 게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다 등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절대 하지 말아라. 제발 부탁이다. 어느 드라마나 영화에서 들어본 듯한 멋져 보이는 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대신 이렇게 해달라. 말없이 안아주자. 그들의 말할 때, 눈 마주쳐주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자. 상대는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슬픔에 공감해주길 바랄 뿐이다. 차라리, 힘내라는 말 대신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자. 그것들이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다. 


슬픔을 위로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



책에서 인용한 <슬픔의 위안>에서는 '순수한 휴식'이 슬픔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라 말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


힘들수록 잘 먹고 잘 쉬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슬픈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 휴식이 왜 어려울까?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 좋은 감정이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걸까?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그 자체로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이 부분을 읽고 저자야말로 슬픔을 겪어보고 슬픔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슬퍼보지 않은 사람은 슬픔에 대해 쓸 수 없다. 슬픔으로 삶이 잠겼던 사람이 아니면, 타인의 슬픔을 정확히 헤아려 위로해줄 수 없다. 


나의 슬픔을 알아주고, 당신의 슬픔을 위로해주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는다. 누군가의 슬픔을 더 달래주고 싶어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겐 슬픔이 덜 하길 바라는 건 무책임하다. 그건 피할 수 없을 테니. 그 대신 그들이 힘들어할 때, 내가 정확하게 위로해주기 위해서 슬픔을 공부한다. 내 앞에 앉은 당신의 눈을 봤다. 그 눈은 진심이었다. 나를 위로해주던 눈빛. 잊지 못한다. 세상에 모든 게 거짓이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실이었다. 당신이 그 순간에 내 곁에 있었기에. 그런 위로를 나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책 표지의 그림은 '팀 아이텔 Tim Eitel'이라는 독일 현대회화를 이끄는 뉴라이프치히파 화가의 작품이다. 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다 미술을 길로 접어든 화가. 그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고독감과 존재를 정확히 보여준다.


참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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