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환경에서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글을 써야 살아지는 사람들이라고 해야겠다. 사람은 전쟁통 속에서도 글을 썼고, 죽음을 앞둔 수용소에서도 끊임없이 자전적 글쓰기를 했다. 나는 글 쓰는 사람들은 뜨거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예전 장강명 소설가 강연에 간 적 있다. 그는 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마음이 있었지만, 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기자 생활을 계속하다가, 퇴근하고 돌아온 어느 날 밤. 그는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한 것. 그렇게 그는 소설가로서 일을 시작했다.
장강명은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그는 '자기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를 가졌다. 자기 신뢰는 예술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척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발칙한 예술가들>에서 이 점을 잘 이야기해준다.
예술가들도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남들의 평가를 받는 일을 두려워할 때가 많다.
하지만 결국 '자기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자기에 대한 신뢰'를 끌어 모아 창작을 해나간다.
<발칙한 예술가들>
장강명은 자신의 소설가 데뷔 스토리와 함께, 소설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 그 강연에 갔던 청중들은 소설을 좋아하거나 소설을 쓰려는 사람들 혹은 쓰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같았다. 그는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은 소설을 써야 한다고 했다. 그 뜻은 결국 자기 안의 본능에 따르고,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키면서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글을 써야 한다. 20대 초반부터 계속 조금씩 글을 써왔다. 21살 때 에디터로 정식으로 글 쓰기 시작하면서 크고 작은 글 쓰는 일을 했다. 허지웅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는 키보드 칠 힘만 있어도 글을 쓸 거라는 말. 그의 말에 숟가락 아니, 펜 한 자루, 아니지 키보드 하나 얹어본다.
최근에 퇴사한 한 친구가 혼자서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글은 항상 '작가로 살아보기'로 시작한다. 그 또한 글을 써야 하는 사람 같다. 동지가 생겨서 기쁘다. 누군가는 계속 글을 써야 한다. 사람들을 위해서도, 스스로를 위해서도. 우리는 모두 예술가이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참고 <발칙한 예술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