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이드(VOID)>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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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는 무(無)만이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오랜 시간 인류는 '무(無)'를 '유(有)' 이전의 단계, 즉 만물의 원천으로 여겨왔습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선행되고, 그 이후에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개념으로 '무'를 이해한 것이죠.
하지만 과학의 시선은 조금 달랐습니다. 빅뱅 이론이 우주 탄생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우리는 우주가 극한의 밀도 상태에서 대폭발을 일으키며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의 영역에서 '무(無)'는 세상의 시작점이라기보다, 물리적인 '상태' 중 하나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시작의 개념이 아닌, 상태로서의 '무(無)'는 과연 무엇일까요?
보통 우리는 공기나 기체조차 없는 상태, 즉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진공'을 '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발견과 수많은 실험은 "완벽한 진공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특정 공간에서 공기를 완벽하게 빼낸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에너지와 입자, 그리고 '장(Field)'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주 낮은 확률일지라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어 있다'고 믿는 그곳은 사실 무언가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 <보이드(VOID)>는 우리가 막연히 '빈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세상의 시작이라는 철학적인 '무'에서 출발하여, 공기를 제거한 물리적 '진공', 그리고 현대 과학이 밝혀낸 복잡한 '공간'의 개념까지 독자를 이끌고 갑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깨닫게 됩니다. 힘이 작동하는 장(Field)이 존재하고 파동이 넘실대는 한,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수많은 요소로 가득 찬 이 우주에 진정한 의미의 '빈 공간'이란 있을 수 없음을 말이죠.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원자를 구성하는 미시 세계의 빈 공간에서 거대한 우주로 확장됩니다.
실제로 우주의 대부분은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별, 행성, 소행성, 운석 등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이 차지하는 영역보다, 비어있는 공간이 압도적으로 넓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압니다. 그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조차 중력장이 지배하고 있으며, 현재의 기술로는 규명하기 어려운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가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공간'이라는 상대적으로 친숙한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인류가 풀어야 할 가장 거대한 숙제인 '우주의 비밀'과 마주하게 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은 어렵습니다. 읽기도 쉽지 않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난해함'이야말로 과학 책이 주는 진짜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읽을 때, 처음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깨닫게 되는 희열이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의 무지함을 뼈저리게 느끼지만, 동시에 새로운 앎을 채워가는 과정. 반복해서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매번 새로움을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힘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다행히 아직 중고 서점에서는 구할 수 있으니, '없음'으로 가득 찬 이 세계의 비밀이 궁금하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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