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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Mar 05. 2020

고양이를 입양보내던 날, 나는 울고 말았다

유기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언더독>

영화 <언더독>을 봤다. '견'생역전을 위해 삶의 터전을 찾아나선 유기견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산속에서 주인공 뭉치가 주인으로부터 버려지는 상황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뭉치는 주인이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고 기다리지만 산 속에서 버려지는 또 다른 강아지를 보면서 자신 역시 버려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곤 우연히 만난 '짱아' 일당과 함께 자유와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뭉치와 친구들은 먹을 것을 얻어 먹기 위해 거리 생활을 전전하지만 자신들을 잡으려 하는 개장수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토리'가 개장수에게 잡혀가는 것을 본 뭉치와 다른 유기견들은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떠나게 된다. 주인에게 버려졌지만 이제부터 내 삶은 내가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뭉치와 짱아. 사람들의 괴롭힘이 없는 그들만의 낙원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가 바로 이 <언더독>이다.


기대 이상으로 정말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틈이 없었고 스릴이 넘치는 장면 역시 많았다. 특히 뭉치가 유토피아를 향해 점프해서 날아오르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동이 밀려오기까지 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개가 주인공이지만 사실 우리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던 이춘백 감독님의 말에도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재밌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유기견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강아지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수많은 동물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들을 버려야 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몇 년 전에 다른 집으로 입양보냈던 우리집 고양이 복길이가.



5년 전쯤인 걸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해왔다. 어른 손바닥 정도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녀석에게 나는 복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렇게 복길이는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고양이를 처음 키워봤던 터라 아는 게 없었지만 인터넷에서 각종 정보를 찾아보며 사랑으로 키웠나갔다. 고양이 특성상 알아서 대소변을 잘 가리다보니 손이 갈 게 없었다. 제때 밥 챙겨주고 수시로 화장실을 깨끗하게 치워주기만 하면 됐다. 낚시줄로 놀아주는 건 서비스~!


문제는 복길이가 커가는 과정에서 생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라던 복길이는 집안 곳곳을 발톱으로 긁기 시작했다. 장판도 긁었고 벽지도 긁었다. 눈에 보이는 건 다 긁었다. 발톱 스크래칭은 고양이의 정상적인 행동이었기에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스크래처를 갖다놓고 교육을 시키다보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낳아지기는커녕 어머니가 아끼는 가죽소파까지 긁기에 이르렀고 엉망이 된 소파를 본 어머니는 참았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가뜩이나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니는 고양이 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고양이 발톱 자국으로 엉망이 된 집안을 보며 인내심에 한계에 온 듯 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니 하고 아빠하고 고양이를 되게 좋아하길래 그거 보면서 참았는데 이제는 안 되겠다. 더 이상 못참으니까 당장 다른 집으로 보내라."


데려온 아이를 어떻게 또 다른 집으로 보낼 수 있냐며 완강하게 버텼지만 계속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어머니를 스트레스 받게 하면서까지 고양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은 채 입양을 결정했다. 키운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고양이를 입양보내던 날, 나는 울고 말았다

입양받을 새로운 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케이지 속 복길이는 처음 보는 낯선 세상이 무서웠는지 자동차 조수석에서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복길이를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제 겨우 적응하고 사는데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보내서 미안해."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울컥한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고양이가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람에 의해 인생이 결정되는 힘 없는 동물을 보고 있자니 제일 나쁜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런 내가 미웠다.


물론 고양이를 유기시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길냥이였던 복길이는 우리가 아니었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기에 아버지가 복길이를 데려온 것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키울 여력이 안 되면 다른 집으로 입양보낼 수도 있는 일이다. 입양이 나의 결정이 아닌 어머니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기에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깐이나마 정을 나눴기 때문인지 복길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새로운 주인에게 복길이를 입양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동물 키우지 말아야지. 끝까지 책임지고 키울 자신도 없으면서 말도 못하는 동물에게 상처주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동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새로운 식구

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했던 나의 결심은 그로부터 1년 뒤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버지의 권유로 새로운 고양이를 입양했기 때문이다. 동물을 끔찍이 좋아했던 아버지는 유기견센터에서 죽음을 맞이할 녀석들을 보고 마음이 많이 아프셨나보다.


"여기 있으면 뭐하겠노. 죽을 거 뻔한데. 우리가 한 마리 데려가서 키우자."


결국 아버지의 설득에 넘어가 다시 고양이를 키우게 됐다. 막상 집으로 데려왔지만 잘한 선택인지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 전에 입양보냈던 복길이 생각이 나면서 또 그와 같은 상황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잘못한 선택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며칠 뒤 하늘나라로 떠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기 전에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고 고양이가 조금이나마 재미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입양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4년 째 함께 살고 있는 우리집 냥이다. 이 녀석의 이름 역시 복길이라고 지었다. 처음 했던 걱정과는 달리 냥이는 우리와 함께 먹고 자며 잘 살고 있다. 전에 키웠던 녀석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안 긁는 데가 없고 털도 많이 날리지만 다행히 어머니의 배려 덕분에 잘 키우고 있다.


예쁜 우리집 냥이를 보고 있으면 가끔은 한 마리 더 키우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단지 귀엽다는 이유로 입양을 해서는 안되기에 그저 생각으로만 그칠 뿐이다. 중성화 수술을 시킨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어미를 따라다니는 귀여운 아기 냥이들을 나라고 왜 안 보고 싶겠는가. 하지만 다 키울 수도 없을뿐더러 나의 욕심으로 어미와 자식을 이별시키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나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냥이의 행복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키운다는 의미의 애완동물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인 반려동물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반려동물에는 식구, 가족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깃들어있다. 하지만 여전히 동물을 키우는 것을 쉽게 새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쉽게 생각하니 쉽게 버리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고 동물을 키우기 전에 과연 내가 책임지고 끝까지 키울 수 있는지 수십 번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인간의 무책임한 선택과 결정으로 인해 버려지고 상처받는 동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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