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에 정수기를 설치했다. 정수기를 설치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고민해야 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직장 때문에 타지로 가게 되면서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님 댁에는 아파트 단지 내 약수터가 있어 물을 받아 먹을 수 있었지만 내가 이사 간 곳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 처음엔 인터넷에서 물을 배송받아 먹었다. 한 번 주문할 때마다 2리터짜리 생수 24개를 받았는데 물을 사먹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넘쳐나는 플라스틱 때문이었다.
분리배출하기 위해 쌓아놓은 빈 물병을 볼 때마다 계속 이렇게 물을 사 먹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평소 환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카페 갈 때는 항상 텀블러를 가지고 간다. 물티슈나 일회용 비닐로 꼭 필요할 때 아니면 안 쓴다. 치약, 샴푸, 화장품 같은 것도 끝까지 꽉 짜서 쓴다. 쓰레기를 최소화하기 위해 무엇이든 이렇게 아껴쓸진대 분리수거장에 가서 2리터짜리 플라스틱 물병 스무 여 개를 버릴 때마다 지구를 아프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곤 했다. 별걸로 다 죄책감을 느낀다 말할 수 있겠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원래부터가 이런 사람이다. 뭐든 자원을 대충 쓰고 버리는 걸 못 견딘다. 그거 아껴서 얼마나 부자되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부자되려는 게 아니다. 그냥 아까운 거다.
물을 사먹는 걸 고민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배송기사 님에게 미안해서이다. 물을 한 번 주문할 때마다 이렇게 6개씩 4묶음, 총 24병을 배송받는데 문제는 우리 집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점이다. 집이 몇 층이냐고? 4층이다. 그러니까 배송 기사님이 이 무거운 걸 들고 4층까지 두 번이나 오르내려야 하는 거다. 배송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뭐가 미안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말은 맞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이니 해야 하는 건 맞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 배송이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실어 날랐을 배송 기사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물론 이 정도 양의 물을 매주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한 달에 한 번 주문하는 건데도 무거운 생수병을 들고 힘들게 계단을 오르내릴 기사 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결국 생수 배송을 중단했다.
약수터에서 물 떠오기
그럼 물 안 마시고 사냐고? 아니다. 평소 물을 많이 마시기도 하고 또 밥도 지어 먹어야 하기에 물은 필요하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기로 했다. 집 근처 어딘가에 약수터 하나 없겠나 싶어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약수터 대부분이 없어진 상태였다. 계속 찾아봤다. 찾았다. 차 타고 집에서 약 13분 거리에 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갈 만했다. 집에 있는 빈 물병 여러 개를 가방에 담아 약수터로 출발했다.
도착해서 보니 약수터라기보다는 시에서 관리하는 비상급수시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물을 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가지고 온 물병을 꺼냈다. 물통을 물로 깨끗이 헹군 후 물을 가득 담았다. 물병이 든 손가방을 양손 무겁게 들고 집으로 왔다. 물이 가득 담긴 물병 여러 개를 집 식탁 위에 놓았다. 꽤 비싼 물건이라도 얻은 것마냥 기분이 좋았다. 물, 이게 뭐라고 잠시나마 부자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 이렇게 떠오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수터를 몇 번 오가다 보니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약수터에 가면 2L 병 6, 7개에 물을 떠 오곤 했는데 적은 양은 아니지만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다 보니 물을 한 번 담아 오면 일주일이면 다 마셨다. 결국 주마다 물을 떠와야 한다는 거였는데 매주 가려니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전기포트로 물 끓여먹기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집에 있는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먹기로 했다. 한 며칠 끓여먹었다. 한 번 끓이면 하루에 다 마셔서 매일 저녁마다 물을 끓여야 했다. 어쩌다 귀찮아서 물을 안 끓여놓고 자면 다음날 아침에 마실 물이 없어 난감했다. 밤마다 물을 끓이고 밤새 식혔다가 물통에 따르고 할 만큼 부지런할 자신이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직장 정수기에서 물 받아오기
직장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오기로 했다. 물병 여러 개를 가져가서 다 떠가면 남들이 봤을 때 너무 없어 보이니 한 번 물을 받을 때마다 2L 물병 1개에만 물을 떠왔다. 물을 끓일 필요도 식힐 필요도 없어 그나마 편리했다. 2, 3일에 한 번 정도로 물을 떠왔고 500ml 물병에도 종종 물을 받아오곤 했다.
그렇게 한 몇 달을 지냈다. 계속 하다 보니 물이 가득 담긴 2L 물병을 가방에 넣고 집까지 옮기기가 좀 무거웠다. 물론 차를 타고 출퇴근 하기에 손으로 물병을 들고 다니는 거리는 얼마 안 되긴 하지만 가뜩이나 다른 짐도 많은데 2L 물통까지 넣고 다니려니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무게도 무게지만 내가 무슨 거지도 아니고 직장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떠오는 게 너무 추해보였다. 물을 받고 있는 나를 보고 직장동료가 "물도둑!!"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말 다했다. 환경보호도 좋지만 일단 좀 사람처럼 살아야겠다 싶었다.
정수기 렌탈을 결심하다
결국 최후의 수단이었던 정수기 렌탈을 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부터 정수기 렌탈을 했으면 간편할 일이었다. 그동안 정수기 렌탈을 생각 안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하려니 몇 가지 애로가 있었다. 일단 싱크대가 비좁아 정수기를 놓을 자리가 부족했고 흔하디 흔한 물을 굳이 돈을 주면서까지 마셔야 한다는 게 왠지 좀 아깝게 느껴졌다. 요즘엔 가정에 정수기를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30년 동안 정수기 없이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먹은 나로서는 정수기 사용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던 것이다. 허나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정수기 렌탈을 결정하자마자 떠오른 정수기가 있었다. J회사의 제품이었다. 재작년에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져서 몸에 좋은 걸 찾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제품인데 보통 정수기와는 차원이 다른 건강에 되게 좋은 물이라 했다. 암을 여러 번 걸렸음에도 다 극복하고 건강관련 자격증만 수십 개가 되며 전국을 쏘다니며 건강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이 추천해준 정수기였기에 웬만한 장사꾼보다는 믿을 만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렌탈비가 47,000원이었다. 1, 2만 원대에 정수기 렌탈이 가능한 곳도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잠깐 고민은 했지만 이왕 마시는 물, 편리함을 넘어 건강까지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J사의 제품으로 렌탈을 결정했다.
정수기를 주문했다. 며칠 뒤 설치기사 님이 집에 방문했다. 기사님이 설치를 하던 중 갑자기 왈,
"이 정수기는 돈 많은 분들만 주문하시더라고요."
'난 돈 안 많은데..ㅋ'
괜히 머쓱하면서도 살짝 으쓱했다.
이어서 내게 말했다.
"이 물 마신 사람들은 전부다 이 물 좋다카데예. 손톱도 나고 무슨 병도 고치고, 어쩌구 저쩌구"
이 정수기의 효능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여러 회사의 정수기 설치를 하는 기사 님에게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니 역시 이 제품으로 사길 잘했다 싶었다. 금방 정수기 설치가 완료됐다.
다음날 아침, 눈 뜨자마자 물을 마시러 정수기 앞으로 갔다. 버튼을 눌러 컵에 물을 따랐다. 컵 안에 가득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불과 전날까지만 해도 물을 마시려면 물을 떠오든 끓이든 뭐든 했어야 했는데 이제는 버튼 하나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신세계를 만난 기분이었다.
정수기 렌탈비는 일종의 환경개선금
지인들에게 집에 정수기를 들여놨다고 말했다. 얼마냐고 묻는 질문에 렌탈비가 월 47,000원 나간다고 했다. 차라리 물을 사먹으면 돈이 더 적게 되는데 왜 굳이 그 비싼 돈을 주고 정수기를 렌탈했냐고 내게 되물었다. 맞다. 물을 사먹는 게 훨씬 저렴하게 친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굳이 비싼 돈 주고 정수기를 렌탈한 이유는 렌탈비를 일종의 환경개선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을 배송시켜 먹으면 비용은 훨씬 적게 든다. 하지만 그만큼 플라스틱 쓰레기가 많이 발생하여 환경오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정수기를 렌탈하면 플라스틱 쓰레기가 생기지 않는다. 고로 환경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플라스틱 그것 조금 안 쓴다고 해서 환경이 좋아질 거라 생각하냐며 나를 극성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걸어온 길만큼은 깨끗해지지 않겠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