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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균

행복천재가 되기 위한

by 다정한 태쁘

최근 모임의 약속이 몇 번이나 미뤄졌다. 서로 바쁜 시기였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정이 어긋나는 날이 쌓이자 불만이 생겼다. ‘약속을 잡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실망감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약속이 어긋난 일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고 서로의 일정이 맞지 않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일정 변경을 ‘가벼이 여김’으로 해석하거나, 몇 줄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의 불편함을 키워갔다. 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데서 오해는 싹트기 시작했다.

사람마다 중요한 일이 다르고, 중요하다고 느끼는 기준도 제각각이다. 그 사실을 ‘이해’ 하지 못할 때 ‘오해’의 씨앗은 가장 잘 자란다.


여러 번의 조율 끝에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에 반가움을 기대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섭섭함을 바로 꺼내놓았다. 그동안 쌓아온 오해들을 하나하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 일행은 “그렇게 대놓고 말한다고?”라며 당혹스러워했지만, 그는 태연했다. “난 뒤에서 말하는 스타일 아니야. 앞에서 말해야지.” 자신의 무례함을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오해는 대개 사실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마음의 틈에서 시작된다. 약속이 어긋난 것, 사소한 일정 충돌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해진 순간, 사소함은 확대되고 확대된 해석은 불신을 낳는다.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실제 문제로 만드는 것은 익숙하다. 오해가 ‘사실’이 아니라 ‘감정’이 된다. 감정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사실도 똑바로 보이지 않는다.

짜증이나 섭섭함을 마주하는 대신, 잘못의 방향을 상대에게 돌릴 때 문제가 생긴다. “내가 서운해”가 “저 사람이 날 무시해”로 바뀌면, 오해는 줄어들지 않고 증식한다.

오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한 번 의심이 생기면 모든 행동이 그 의심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처럼 보인다. 웃으면 비웃는 것 같고, 인사하면 형식적으로 느껴지고, 배려하면 뒤가 있을 것 같고. 결국 정말로 관계는 나빠진다. 오해는 이렇게 현실을 뒤틀어 스스로 만든 상황을 현실처럼 굳힌다.


“난 뒤에서 말 안 해. 앞에서 다 말해.”라는 말을 자부심처럼 쓴다. 자신을 정직하고 솔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정직일까?

솔직함과 무례함의 경계는 생각보다 분명하다. 진짜 솔직함은 진실을 전하지만,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내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상대의 상황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혹시 다른 사정이 있었어?”라고 묻는 태도. 그게 솔직함이다.

반면 무례함은 오직 자신의 감정만 진실이라고 여긴다. 상대의 맥락은 무시한 채 자기 해석을 사실처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런 솔직함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공격이다.


오해하기 시작한 사람은 결국 상대를 미워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상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오해는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공격의 파편은 먼저 자기 안에 꽂힌다. 어른들이 “불평·불만하지 마라”라고 했던 말에는 오래된 지혜가 담겨 있다. 불평은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오해하는 습관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 사소한 일에도 서운해지고, 작은 말에도 상처받고, 선의를 의심하게 된다. 세상은 점점 적대적이고, 사람은 점점 믿기 어려워지고, 외로움만 짙어진다. 그 외로움이 다시 오해를 만들고,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행복은 사건이 아니라 해석에서 온다. 같은 상황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마음의 온도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정도의 차이를 이해하고, 누군가는 작은 어긋남도 큰 무시로 받아들인다. 해석이 다르면 하루의 무게가 달라진다.

오해가 깊어지면 행복이 설 자리를 잃는다. 마음의 여유에서 자라야 할 행복은, 조여 오는 의심 속에서 숨이 막힌다. 결국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행복의 조건이며, 섣부른 판단은 불행의 조건이 된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정하지 않는 능력이다. “혹시 다른 사정이 있었을까?”, “내가 놓친 게 있나?”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 그 작은 질문이 관계를 지키고, 내 마음을 지킨다.



그래서 나는 오해가 짙은 사람과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들을 탓해서가 아니다. 그의 오해가 내 마음의 평온까지 흔들어 놓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삶에는 해명하느라 소모할 시간이 많지 않다. 내 행복은 불필요한 오해에서 멀어지는 데서 출발한다.
오해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은 결국 나를 닳게 만든다. 아무리 설명해도 의심하고, 아무리 배려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아무리 선의를 건네도 왜곡한다. 그런 관계에서는 어느 순간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없게 된다.

이해하려는 사람들, 선의를 먼저 가정하는 사람들, 문제가 생기면 대화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런 관계에서는 방어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존중받는다.

오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작은 여유가 우리의 일상과 행복을 지켜주는 가장 보통의 행복이자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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