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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Jun 09. 2022

뚜벅이의 출장

 어쩌다 한 번씩 사주를 보러 다녀오는 엄마는 내게 역마살(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늘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운)이 있다고 전해줬다. '오호라!' 어려서부터 전 세계를 유랑하는 여행자를 꿈꿨던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꼭 로망을 실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직 세계 여행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축구기자가 된 후 나는 그 역마살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축구가 진행되는 현장을 찾아 전국 곳곳을 누비게 된 것은 내 가장 큰 신변의 변화라 할만하다.


 지방 출신인 데다 어려서부터 엄마랑 아빠를 따라 국내 여행을 제법 다닌 편인데도, 출장이 아니라면 생전 가보지 않을 법한 지역에 발을 딛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K리그에 속한 프로 구단들은 대부분 대도시에 자리를 잡고 있어 새로울 것이 없지만, 아마추어 축구를 취재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중·고·대 전국대회가 열리는 지방 소도시나 군 단위, 읍·면 단위의 지역을 오가다 보면, 이 작은 한국 땅에서도 시차를 느낀다. 시각의 차이(時差)가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다르다. 어쩌면 시각의 차이(視差)인지도 모르겠다.


 전국대회 유치는 지방 지자체들이 앞다퉈 힘을 쏟는 큰 사업이다. 전국대회 유치로 해당 지역에 수백수천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수단 인원 자체가 많은 축구는 경제 효과를 톡톡히 가져다주는 종목일 것이다. 한산했던 시골에 선수, 지도자, 스태프, 학부모, 동문 선후배, 심판, 스카우터, 에이전트, 취재진 등이 몰려드니 해당 지역의 소상공인들이나 자영업자들로서는 명절보다 나은 대목인 셈이다. 지자체들이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넓은 땅을 확보해 스포츠파크나 축구공원을 조성하는 이유다.


 나 역시 지역경제 활성화에 한몫을 했다. 면허는 있지만(갱신도 했는데) 자가용이 없는 나는 약 8년간 대중교통으로 전국 곳곳을 누벼왔다. 심야 버스는커녕 오후 5~6시면 관외로 나가는 버스가 끊기는 지역이 대부분이기에 숙박은 기본이고, 그렇게 되면 향토 음식점에서 최소 두 끼를 해결해야 한다. 가끔은 그 지역의 특산물을 사들고 돌아오기도 했는데, 같은 지역에 두어서너 번 가게 되자 좀 지나서는 자제했다. 관내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으니, 확실히 자가용이 있는 방문객보다는 한몫을 크게 하지 않았을까?


 나 같은 뚜벅이에게 출장의 난이도는 거리로 평가되지 않는다. 교통편이 얼마나 잘 갖춰져 있는지가 중요하다. 선택지는 다양한지, 환승이 유연한지, 도로 사정은 어떤지, 소요 시간 대비 가격이 적정한지 등을 고루 살펴야 한다. 경북 경주시나 전남 목포시 같은 경우에는 멀긴 해도 출장이 부담스럽지는 않다. KTX가 있기 때문에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비교적 조금 덜 먼 경남 창녕군이나 경남 합천군 같은 경우에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훨씬 고되다. 극악 난이도의 지역은 물론 물리적인 거리가 먼 동시에 교통편도 나쁜 경우다. 전남 강진군과 경남 남해군, 경남 통영시가 대표적이다.


 다섯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진다. 한동안 약간의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았던 나로서는 고역 한 스푼 추가다. 그래서 나는 더 번거롭더라도 환승을 해서 버스 타는 시간을 줄인다. 예를 들어 창녕스포츠파크(경남 창녕군 부곡면)에 갈 때는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부곡행 시외버스를 타도 되지만,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린 뒤 지하철을 타고 대구서부정류장으로 이동해 부곡행 시외버스를 타는 것을 선호한다. 남해스포츠파크(경남 남해군 서면)에 갈 때도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남해행 시외버스를 타도 되지만, KTX를 타고 진주역에서 내린 뒤 시내버스를 타고 진주터미널로 이동해 남해행 시외버스를 타는 것을 선호한다. 실제 소요 시간은 별 차이가 없고 이동 시간과 버스 출발 시각을 잘 계산해야 하며 환승 중에 변수가 생길 것을 고려해야 하지만...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며 '이런 데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싶은 곳들에 잠시 정차했다 출발하는 완행 시외버스를 타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대체로 나는 그 버스의 최연소 탑승객이 되는데, 노인들께서 사투리로 무어라 나누는 정담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이촌향도, 수도권 인구 집중, 지방 소멸, 고령화 등의 키워드를 떠올린다. 10년 전 혹은 20년 전에서 멈춰버린 것만 같은 낙후된 인프라의 읍내를 관찰하고 있으면 갑자기 나는 축구 취재 가다가 인간 사회 걱정하는 사람이 된다. 이어서 나는 내 고향 강원 강릉시와 그곳에 살고 계신 엄마랑 아빠, 돌아가신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게 이미 익숙해진 서울살이를 언제 끝낼 것인지, 끝낼 수 있는 것인지, 끝낸 다음에는 어디서 무얼 할 것인지 생각한다.


 일과 상관없는 고민을 하다 보면 마침내 일할 현장에 도착한다. 현장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션을 하나하나 수행하듯 임하는 출장길은 수행의 길이다. 하지만 그런 뚜벅이로서의 고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쩔 때는 '내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악에 받친 생각이 '개고생의 보람이 있는 기사를 쓰자'는 동기부여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출장에 투입된 내 시간과 심리적·체력적 에너지, 그리고 회사의 돈을 생각하면서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자판을 두드린다. 이럴 때 보면 제법 성실한 직장인이다.


 일과는 별개로 "출장도 여행처럼" 하라던 엄마의 말을 애써 되새기며 얻는 즐거움도 있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대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강릉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산이든 바다든 생소한 풍경은 아님에도, 통영과 남해에서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리아스식 해안(해안선이 복잡하고 곶과 만이 많은 해안)을 보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통영터미널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통영산양스포츠파크(경남 통영시 산양읍)로 가는 길에 본 반짝이는 바다의 풍광은 잊을 수 없다. 굳이 출장 경비를 아낄 만큼 애사심이 큰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웬만하면 택시를 타지 않고 시내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곤 한다. 그런 습관은 모두 통영에서와 같은 잊지 못할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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