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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정 Mar 16. 2020

진짜 바이러스

 세상은 이미 망했다! 몇 년째 이 생각으로 산다. 세상은 망한 지 오래다. 희망은 없다. 매일매일 화나는 뉴스에 화를 내다 지쳐 더 이상 화낼 힘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 이 생각을 한다. 아, 어차피 망했지?


 꽤 오래전부터 허무주의자였다.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삶은 원래 고통이야", "사람은 다 죽어" 따위의 말을 하며 눈을 게슴츠레 뜨는 그런, 재수 없는 타입.


 차라리 냉소와 비관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아니다. 부끄럽지만(이게 왜 부끄러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삶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한다. 매일매일의 삶이 너무나 미약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내가 사는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어찌나 비대한 짝사랑인지!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삶과 세상과 사람, 모두 망한 셈 치기로 했다. 내 생각과 결정, 행동, 결과 모두 오롯이 지금 내 기쁨과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약속했다.


 아, 물론 미련은 아직 많다. 요즘 느끼고 있다.


 코로나19(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한 달 넘게 난리다. 전 세계적 비상사태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졌고, 곳곳에서 크고 작은 혼란이 일어난다.


 시리아 내전, 난민 위기,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 같은 근래의 굵직한 국제 이슈들이 떠올랐다. 이럴 때마다 다시 생각나니까. 다 망한 셈 치기로 한 진짜 이유.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망해가고 있다. 일상을 무너뜨린 것은 코로나19이지만 무너진 그곳의 바닥에는 온갖 차별과 혐오, 부정부패와 착취, 무능력과 불신이 있다. 치사율은 낮고 전염률은 높은 바이러스. 오랫동안 번식과 변이를 거듭해온 바이러스가 개인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지독한 폐허. 희망을 이야기하기에는 숙연할 정도로 애처로운.


 언제쯤 짝사랑이 끝날까? 짝사랑이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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