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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롤모델 상사가 롱런하는 비결

직장인의 고슴도치 개념

by 함태진

쉴 새 없이 이어진 미팅, 끝없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그리고 졸음을 쫓기 위해 휴식시간마다 제공되는 커피와 간식. 3박 4일 동안의 싱가포르 출장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야 비로소 혼자 조용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번 출장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리더십 팀이 한자리에 모여 새해의 전략을 논의하는 연례 모임이었다. 나흘 내내 모든 참석자들이 진지한 얼굴로 비즈니스 목표와 전략, 성과 지표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시간은 회사의 경영철학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 종일 나누었던 워크숍이었다. 예전에 MBA 과정에서 수없이 접했던 경영이론들이 다시금 튀어나오면서, 마치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논의했던 여러 가지 개념과 이론들 중에서도 특히 내 머릿속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경영학 서적 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Good to Great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고슴도치 개념 (Hedgehog Concept)“이었다.



여우와 고슴도치

원래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격언에서 비롯되었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지만, 고슴도치는 단 하나의 중요한 것을 안다."


여우는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나 다양한 전략을 짜고 여러 가지 술수를 부린다. 반면 고슴도치는 단순하다.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밖에 없다. 위험이 닥치면 복잡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저 몸을 둥글게 말아 가시를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그 단순한 방어전략을 누구보다 잘 실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영리한 여우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온갖 방법으로 공격해도, 결국 매번 결과는 고슴도치의 승리로 끝나기 때문이다.


경영학자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이 개념을 기업 경영에 적용했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기업들은 수많은 기회들을 쫓아다니기보다는 딱 세 가지 핵심 요소에 집중한다고 한다.

첫째,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둘째, 자신들이 진심으로 열정을 느끼는 것

셋째, 경제적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 것


미팅 내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개념은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 같은 개인에게도, 특히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unsplash.com/@1weingartma


50대의 현실인식

40대 후반을 지나 50대 초반으로 접어들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나 동료들과의 대화 주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30대와 40대 때에는 주로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수 있을까?' '어떤 성과를 내야 더 빠르게 승진할 수 있을까?'가 주요 화두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여기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가 주된 질문이 되었다.


냉혹한 현실이다.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직장인들에게 ‘야망’ 보다는 ‘생존’이 더 중요한 이슈가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직장 구조에까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현직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내 상사가 특별한 존재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상사와 고슴도치 개념

손주를 여럿 둔 60대의 프랑스인인 나의 상사 D는 회사에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이미 여러 글로벌 기업에서 최고위직을 거쳤고, 비교적 최근에 우리 회사에 영입되었다. 그런 만큼 경험도 많고 능력도 출중하다. 그런 그에게, 회사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는 욕심 같은 것은 딱히 없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더 근사한 직책이나 더 높은 직급조차도 이미 다 경험해 본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D는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열심히 일한다. 빈틈없고 사려 깊고 항상 에너지가 넘친다.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챙기고, 팀원들을 적절하게 독려하면서도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서, 사람들이 어떻게든 성과를 내게 만든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을 느낀다.


어느 날 누군가 D에게 물었다.

"그 나이에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뭡니까?"


D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 그건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을 내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잘하기도 하고, 그러니 회사도 나를 필요로 하는 거겠지요. “
“Oh, I love what I do, I’m good at it, and it’s something the company values."


바로 그거다. 복잡한 전략도, 거창한 철학도 필요 없다. 그저 매우 실용적인, 전형적인 고슴도치 개념인 것이다.



나만의 고슴도치 전략을 찾아서

나 역시 이제 딱히 더 높은 자리가 욕심나지는 않는다.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나간 듯하다. 하지만 나의 상사 D처럼, 계속 어딘가 쓰임새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크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의 일이 여전히 나에게도, 그리고 조직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하는 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고슴도치 개념을 찾아야 한다.

나는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가?

나의 조직이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슴도치 개념은 경영 전략이라기보다는 생존의 방식이다. 직업세계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여우처럼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고슴도치인지를 스스로 아는 가장 단순한 자들이다.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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