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요양원에서 문자가 왔다. 어르신들과 함께 화전(花煎)을 부치는 행사가 있다고 했다. 찹쌀전 위에 식용 꽃을 얹어서 만드는 전인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거라고 한다. 가족들도 참여 가능하단다.
'그래, 찹쌀로 만든 부드러운 전이라면 엄마도 좋아하시겠지.'
참가신청을 했다.
행사 당일, 시간에 맞춰 도착했더니 요양원 강당에는 이미 몇몇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전을 부칠 프라이팬과 미리 준비된 재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잠시 후, 어르신들이 한 분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떤 분은 보행보조기를 써서 조심조심 걸어오시고, 어떤 분은 요양보호사가 휠체어에 태워 밀고 왔다. 그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엄마!”
나는 재빨리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내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둥그렇게 뜬 눈으로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 내가 누구예요?”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들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그때, 엄마가 뜻밖의 말을 툭 내뱉었다.
“태진이가 청소년인 줄 알았는데…
니가 언제 이렇게 아저씨가 되었노?”
그 순간 옆에 있던 다른 가족분들과 요양보호사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가 이젠 내 현재 모습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싶은 마음에 묵직한 감정이 가슴 한켠에서 올라왔지만, ‘니가 언제 아저씨가 되었냐'는 그 말이 너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같이 웃고 말았다.
“엄마, 엄마가 몇 살이에요?”
“모른다.”
“여든이 훌쩍 넘으셨죠?”
“그런가?”
“내가 엄마보다 딱 서른 살 어리잖아요. 그럼 내가 몇 살이에요?”
“모르겠다. 그래서 니가 몇 살이고?”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열다섯 살이요.”
그러자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신다.
“그건 너무 어린것 같다.”
“아, 그래요? 근데 엄마는 내가 청소년인 줄 알았다며?”
“그래도 열다섯은 말이 안 된다.”
“아, 내가 그 정도로 어린 건 아닌 모양이네? 그럼... 사실은 스물다섯이에요.”
엄마는 그 말이 참말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마, 내가 청소년인 줄 알았는데 아저씨가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 니가 언제 이렇게 아저씨가 되었노.”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그걸 모르겠어요. 언제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여러번 울었다. 그중에 이런 장면이 있다.
딸을 보고 싶어서 일을 핑계로 서울로 상경했던 아빠가, 짧은 만남 후에 버스 터미널에서 딸과 작별한다. 삶에 지쳐 힘든 딸은, 아빠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대신 속이 복잡한 듯 뿌루퉁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런데 차창 밖의 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흔드는 아빠의 눈에는, 지금의 어른이 된 딸의 모습이 아니라, 십수년 전에 한창 아빠를 찾던 너무나 작고 어린 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자주 보지 못하는 딸아이 생각이 갑자기 겹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엄마에게는 내가 아직 한참 어린 청소년 아들로 기억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청소년이었을 무렵, 엄마는 지금의 내 또래였거나 혹은 오히려 지금의 나보다 조금 더 젊으셨었다. 어쩌면 엄마의 마음도 이제는 세월을 거슬러서 그 시절에 다다라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엄마의 삶은 어떠했으며 어떤 생각을 하셨었을까? 한 번도 그런 것을 궁금해 해 본 적 없다는 것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동그랗게 떼어낸 찹쌀 반죽에 팬지, 비올라 등 각양각색의 예쁜 꽃을 얹어 노릇하게 익혔다. 워낙에 꽃을 좋아하는 엄마는 예쁘기도 하고 맛도 좋다며, 연신 맛있게 잘 받아 드셨다.
한 입 한 입 천천히 드시는 엄마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엄마가 내 입에 자꾸 뭔가를 넣어주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엄마의 입에 계속 화전을 조금씩 떼어서 넣어드리고 있다.
"맛있다."
화전을 오물오물 씹으며 엄마가 조용히 읊조리셨다.
꽃은 금방금방 익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2025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