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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말아요, 엄마. 내가 다 기억하고 있을게.

by 함태진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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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무렵이면 기계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즐겨찾기 맨 위에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누른다.


‘뚜- 뚜- 뚜-‘.

신호음이 한참 울리다가 자동응답기로 넘어간다. 그러면 전화를 끊고 잠깐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시 건다. 또 신호음. 또 자동응답기. 그렇게 두세 번을 반복하다 보면 어떤 날은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전화를 대신 받아주신다. 그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넘겨드리는 소리.

“어르신~, 전화예요.”

드디어 전화기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 누구세요?”
“엄마~. 아들!!!”

나는, 퇴근 시간이면 항상 나와 통화하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라도 엄마의 기억을 자극해 주기를 바라며, 크고 밝은 목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예전에는 첫 번째 ‘뚜—’ 하는 신호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득달같이 전화를 받으셨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었다.

“아이고, 반가워라~ 아들!”


전화를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받느냐고 물으면, 엄마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서 내 전화가 오기만을 하루 종일 기다리셨다고 했다. 고맙고 애틋한 말이어야 했지만, 나는 때때로 그 말이 반갑기보다는 무겁게 느껴지곤 했었다. 특히 하루 일과가 고단했던 날은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내가 먼저 전화해 놓고선 짜증을 내고 만 날들도 많았다.


매일 20-30분씩,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와의 통화는 늘 거의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미 수백 번은 했을 그 이야기들이 늘 그렇게 재미있으셨는지 깔깔깔 잘도 웃으셨었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의 그런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다. 전화받는 법을 잊어버려서 통화를 못하는 날이 더 많고, 어쩌다 연결이 되어도 엄마는 예전처럼 감정 표현을 잘 못하신다.


이제는 내가 예전에 엄마가 나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들을 거꾸로 엄마에게 들려준다. 혹시나 엄마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다시 한번 엄마의 밝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고.


“엄마.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장꼭재를 넘어서 매일 20리를 걸어 다녔잖아요.”
“엄마 어릴 적에 살던 집에 과일나무랑 꽃나무가 그렇게 예뻤다면서요.”


하지만 엄마는 그 이야기들이 더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처음 듣는 이야기인 것 같은 표정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며칠 전엔 통화를 끝냈는데, 엄마가 전화를 제대로 끊지 않고서 전화기를 내려놓았던 모양이다. 나는 엄마 주변의 일상에서 나는 소리를 들어볼 셈으로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는 오래도록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크고, 아주 깊고, 아주 무거운 고요만이 가득했을 뿐이다.


아마 예전에도 그랬었기에, 내 전화가 그렇게 기다려지고 반가왔던 것 아닐까? 오래전부터 엄마가 하루 종일 이런 정적 속에 혼자 계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파왔다.




주말에 요양원으로 엄마를 보러 갔다. 면회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 요양보호사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면회실에 들어서는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누고?”

그러자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웃으면서 엄마에게 말한다.

“어르신~. 아드님이 셋이라면서요. 이분은 몇째 아드님이셔?”

하지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엄마는 대답을 얼른 못한다. 행여나 틀린 대답을 할까 봐 내가 먼저 말했다.

“태진이잖아요, 엄마! 셋째."

나는 엄마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윙크를 하며 말했다.

"맞죠?"

그러자 엄마가 놀란 표정으로 대답한다.

"태진이?"


30분이라는 제한된 면회 시간. 나는 밝은 얼굴, 과장된 몸짓과 씩씩한 목소리로 계속 떠들었다. 엄마가 기억할만한 이야깃거리들을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꺼내보면서. 하지만 엄마는 이제 그런 이야기들을 거의 대부분 기억을 못 하신다.


다행히 엄마 특유의 호기심만은 여전히 살아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본인 얘기였다는 사실은 잊은 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다음은?” 하고 한번씩 물으셨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근데 엄마, 진짜 이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라고 묻자, 엄마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젠... 바보가 되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엄마의 무덤덤한 어조에 슬픔과 답답함이 묻어났다.


순간,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엄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요.
엄마가 기억 못 해도 내가 다~ 기억하잖아. 내가 다 기억해 줄게요.”


그 말에 엄마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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