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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Dec 16. 2019

대표이사라는 역할

좋은 리더가 되고싶다면

보스톤(Boston)에 학회 참석차 출장을 왔다. 2005년 당시 미국에 살면서 다녀간 이후로 처음 왔으니 14년 만이다. 일정 내내 거의 숙소와 학회장만 오가다가 마지막 날 잠깐 짬을 내서 숙소 근처에 있는 펜웨이파크(Fenway Park)를 찾았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명문구단 보스톤 레드삭스(Boston Red Sox)의 홈구장이자 1912년에 지어져 메이저리그 야구장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이다. 새로 지어진 다른 경기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편이고 시설도 낡은 느낌이지만, 그런 만큼 대단한 전통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브래드피트(Brad Pitt)가 주연한 영화 <머니볼(Moneyball)>의 마지막 장면에 이곳이 등장하는데, 2002년 메이저리그 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킨 오클랜드 애슬래틱스(Oakland Athletics) 야구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브래드피트는 오클랜드 야구단의 제너럴매니저(General Manager, 단장) 빌리(Billy)로 나온다. 그는 구단의 예산 부족 탓에 훌륭한 선수들을 다른 부유한 구단들에 다 빼앗기고 적은 돈으로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해서 팀을 다시 꾸려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하지만 빌리는 결국 그 당시 모두가 비웃던 새로운 선수 영입 방식을 시도해서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최고의 팀인 보스톤 레드삭스로부터 천문학적인 연봉과 함께 레드삭스의 GM 자리를 제의 받는다.

이 영화의 초반에는 빌리가 수십 년의 관록을 가진 선수 영입 전문가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긴장감이 넘치다 못해 짜릿하기까지 하다. 기존의 방식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려고 해서는 결코 좋은 팀을 꾸릴 수 없다고 믿는 빌리가 선수영입팀에게 새로운 관점을 갖고 일해 줄 것을 요구하지만 소위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 그들은 빌리의 말에 시큰둥해하며 저항하는 장면이다.

빌리: What the f**k are you talking about man! If we try to play like the Yankees here, we will lose to the Yankees there.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양키즈 구단이랑 똑같이 하면 결국 양키즈한테 질게 뻔하다구.)

선수 영입 팀장: (비꼬는 말투로) Boy, that sounds like some fortune cookie wisdom to me Billy. (이보게 Billy. 그딴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럴싸한 소리로 밖에 안 들리네.)




제너럴매니저(General Manager)라는 역할을 주연으로 하는 또 다른 흥미 있는 영화로 케빈코스트너(Kevin Costner)가 주연한 <드래프트 데이(Draft Day)>가 있다. 미식축구팀 클리블랜드 브라운스)(Cleveland Browns)의 단장인 쏘니(Sonny)가 프로선수 영입의 최대 이벤트인 NFL Draft 행사 당일 하루 동안 긴박하게 벌이는 일련의 막후 협상과 반전을 숨 막히게 그려낸 영화다. 영화 속에서 Sonny는 구단의 GM으로 일한 지 3년 차에 접어들었음에도 아직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팀을 꾸리지 못한 상태였다. 자신의 상관인 구단주와 팀의 감독, 스태프들, 선수들, 그리고 팬들의 희망사항이 모두 다른 상황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소신대로 팀을 구축하려고 애쓰는 Sonny의 모습이 왠지 짠해 보였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14년은 내가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로 일한 지 딱 1년이 되는 시점이었기에 당시 이 영화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중간에 끼어서 자기 생각대로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낑낑대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동병상련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라는 역할… 보통은 외국계 회사에서 주로 쓰는 직함이다. 특정 부서를 이끄는 부서장(functional leader)과는 달리 조직의 손익(P&L, Profit & Loss)을 책임지면서 모든 부서를 총괄해서 관리해야 하는, 때로는 시시콜콜한 일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일까지, A에서 Z까지 모든 것을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야말로 제너럴 매니지먼트(general management)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다국적 기업의 국가별 헤드, 대표이사, 사장, 법인장 등을 일컬을 때 흔히 쓴다.


2013년 3월 24일. 당시 대외협력 부서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날 국회에서 열리는 어느 정책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가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시아 지역의 총괄 사장인 J였다.


"Taejin nim, how are you? I have an offer to make to you. It’s a General Manager position for Singapore, Malaysia, and Brunei. What do you think? (태진님, 잘 지냈어요? 당신에게 싱가포르/말레이시아/브루나이 3개국의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예기치 못했던 전화였지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언젠가부터 나도 GM으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막상 GM으로 일을 시작하자 영어로 ‘소화전 호스로 물을 들이켠다 (drinking from the firehose)’는 표현처럼 온갖 처리해야 할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해?’ ‘이런 일들도 실제로 벌어져?’ 싶은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 J는 나에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최대한 빨리 내가 맡은 국가들의 경영진(Leadership Team)을 탈바꿈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경영진의 구성원들 각각을 냉철하게 평가할 것을 요구했고 어떻게 최고의 팀을 꾸릴 것인지에 대한 나의 계획을 끊임없이 물었다.


새내기 GM인 나는 의욕은 넘쳤지만 막상 사람을 평가하고 조직에 변화를 주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기대는 나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고 변화가 느린 만큼 회사의 성과 개선 역시 지체되는 것 같아 초조해졌었다. 결국 여러 가지 사건사고와 우여곡절 끝에 조직의 정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마침내 늦게나마 팀의 진용이 새롭게 갖춰지자 그때부터 회사의 분위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머니볼(Moneyball)>이나 <드래프트 데이(Draft Day)> 같은 영화가 내게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주인공들이 너무 미남이어서…? 가 아니고, 어쩌면 두 이야기 모두 기존의 체계와 질서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이들, 일종의 '언더독(underdog, 약자)'의 이야기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배경이나 외모, 스펙 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사람들, 그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그들이 성공하기를 염원하는 GM들이 그렇게도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의 <How Managers Become Leaders (매니저는 어떻게 리더가 되는가)>라는 글에 보면 부서장(functional leader)이 대표이사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될 때 겪어야 하는 변화를 7가지로 정의하는데 그중에 '벽돌 쌓는 사람(bricklayer)'에서 '건축가(architect)'로 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집을 짓는 건축가처럼 조직을 짓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제 조직의 성과를 직접 손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그 조직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뛰어난 구성원들이 모여서 제일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조직을 꾸리는 것이야 말로 대표이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이다. 경영학의 대가인 짐콜린스(Jim Collins)도 <Good to Great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위대한 회사를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 중의 하나로 “First Who… Then What (좋은 사람이 모이는 것이 먼저이고, 과업을 논하는 것은 그 다음)”을 언급한다. 훌륭한 구성원들로 팀을 꾸리는 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단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경력이나 화려한 말솜씨에 감탄해서 뽑은 사람이 막상 업무에서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들을 가끔씩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안타깝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한번 결정하면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뽑으려는 노력을 계속 멈추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실 뛰어난 역량을 가졌음에도 제대로 된 지도를 받지 못해서 혹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서 자신의 역량만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적절한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이 교육이건 직무이건 코칭이건) 또 그들이 일터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대표이사의 역할이자 과제이다.


휴…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멀다.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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