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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Aug 14. 2020

최악의 상사

나쁜 상사가 되고 싶지 않다면

Latte is a horse???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점심 먹고 직원들과 함께 간 회사 앞 커피숍에서 이 엉터리 영어 문장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젊은 직원들의 설명을 통해 그 뜻을 알고 나서 얼마나 깔깔깔 웃어댔던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라떼를 쏟을 뻔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니 직원들이랑 이야기할 때 알게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행여나 나도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라떼’는 아닌가 해서…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90년생이 온다>의 작가는 C사에서 90년대생 신입사원들의 입문교육을 담당하면서 보고 느낀 점을 책으로 썼다고 한다. 80년대생인 작가가 자신이 교육받았던 방식대로 90년대생 후배들을 가르치려 해 보니 그것이 더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나의 C사 10년 후배이다. 나는 ‘라떼의 라떼’인 셈이다. ㅠㅠ

내가 C사에 처음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었다. 입사 동기 하나가 잔뜩 화가 난 팀장의 방에 불려 들어갔는데, 이내 큰 소리가 나더니 팀장에게서 뺨을 3대나 연달아 맞은 것이었다. 고개가 픽픽 돌아가도록 뺨을 맞으면서 내 동기는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나에게 그것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상사는 그 팀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회사 내의 또 다른 분이었다. 만년 과장이었던 그는 항상 허허실실 하며 딱히 모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문제 해결 능력이나 뭔가를 악착같이 해 내려는 열정 혹은 명확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이 그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분이었다. 처음엔 그를 잘 따랐던 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도 점점 그를 닮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무엇인가를 계속 배우고 성장한다는 느낌이 특히나 중요했던 것 같다. 내가 회사에서 더 이상 성장하거나 배우는 것 없이 단지 가진 능력을 소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다국적 기업의 해외 법인 대표이사로 처음 발령을 받고 나서 리더십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어떤 리더가 좋은 리더일까?

부임지로의 출국을 위해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일간지의 기자분께서 전화를 하셨다. 글로벌 회사에서 인정받는 한국인 리더들에 대한 취재를 하는 중이라며 외국법인에 사장으로 부임하는 포부를 알려달라고 했다. 당시 내 머릿속을 맴도는 키워드는 ‘성장’이었다. 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직원들도 성장하도록 도우면서 그들의 성장이 회사의 성장으로 이어지도록 만들고 싶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한마디로 ‘Grow Business by Growing People (사람을 성장시킴으로써 사업을 성장시키다)’이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한 줄 짤막하게 인용이 되어 있었는데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의 제목이 “글로벌 기업 해외법인장 ‘어그레시브 코리안’ 전성시대”였다는 것인데 ‘Aggressive Korean’은 전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어서 약간 헛웃음이 나왔었다.



막상 동남아 현지에 도착하니 나를 맞이하는 직원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하면 ‘aggressive 하다’는 일반적인 선입견이 실제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대표이사로서의 ‘나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머리에 화살표가 달린 사람이 한쪽 손을 번쩍 들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는 ‘직원들이 매일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회사, 거리낌 없이 '스피크업(speak up)' 할 수 있는 회사, 서로 존중하는 회사, 그리고 돈 잘 벌어서 월급 많이 주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직원의 입장에서 바라던 회사의 모습이 그런 것이었고, 이제 그런 회사를 만들 수 있는 권한과 기회와 책임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현지 법인의 임원들은 모두가 오랜 기간 함께 일해 온 현지인들이었다. 그중에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지역본부로부터 인정받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회사로부터 저성과자로 지목당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을 빨리 교체하라는 상사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열심히 코칭해서 그들의 성과를 향상시켜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들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만 강조하기보다는 그들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켜주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서 변화하고 발전하고 싶다는 욕구를 그들 안에 불러일으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변화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저성과자 중 일부만이 나의 피드백을 (온갖 변명 대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또 그중의 소수만이 실제로 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람마다 소위 코칭이 가능한지 (즉, 'coachable' 한지) 아닌지가 달랐던 것인데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그저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하면 모두가 좋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기마다 열리는 아시아 지역 사장단 회의에서 각 나라의 법인장(General Manager)들의 리더십 성향에 대한 워크샵을 한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GM들의 '성향색깔(insight color)'이 붉은색이었던 반면, 나는 거의 유일한 초록색 리더였다. 유명한 심리학자 칼융(Carl Jung)의 이론에 바탕을 둔 이 분류법에 따르면 붉은 색깔의 리더들은 경쟁적이고 결과 지향적이며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반면 초록색 리더들은 조심스럽고 차분하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 자리에 모여있던 대부분의 붉은색 리더들은 초록색 성향의 나를 보며 신기하게 여겼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한 가지 색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색깔이 가장 지배적(dominant)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사실 모든 사람이 네 가지 색깔(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을 조금씩 골고루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비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경험이나 역할로 인해서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코칭과 격려와 칭찬만으로 성과를 바꾸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서서히 배워 알게된 것이다. 아무리 기회를 주고 참고 기다려준다고 해도 회사가 기대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요원한 사람들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김응용 감독은 종종 괜찮은 A 선수들을 내치곤 했는데  인터뷰에서 그는 ‘쓸만한 선수를  내보내느냐?’ 질문에 “쓸만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직 다른 곳에서 인정받을 만큼의 실력은 있지만 자신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 선수들을 계속 붙잡고 있기보다 아직 ‘쓸만할 내보내 줌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새로운 길을 찾고 성공적으로 재기할  있게  줬다는 것이다.

바꿔보려고 내가 오랜 시간 노력했던 임원 하나를 처음으로  손으로 내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나는 마음이 아파서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독대하기 위한 면담 약속을 잡은 '(D-day)' 전날에는 그에게 어떻게  결정을 알릴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몇십 번씩 시뮬레이션 하느라 밤을 거의 꼬박 새우다시피 했다.

“Leadership is not a popularity contest. (리더십은 인기 경쟁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인기를 얻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인지상정일지 모르지만, 리더는 그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코우쳐블(Coachable)' 하지 않은 저성과자를 조직에서 내보내는 일을  이후로도  차례  경험해 보고 나니 이제는 그러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것이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경험만큼 트라우마스럽지는 않다. 이젠 나도 '붉은색 리더' 되어버린 것일까?

<꾸준함을 이길  어떤 재주도 없다>라는 책에서는 ‘맑은 날만 계속되면 삶은 사막이 된다 어느 나라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편하게 해주는 상급자는 인생을 망치는 선배이며 ‘좋은 사람은 배려해주는 사람이지, 일을 대충 하게 놔두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역시 ‘좋은 사람 되고 싶다는 나의 무의식적인 욕구가 ‘좋은 리더 되고 싶다는 나의 의식적인 목표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아직도 시시때때로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

 받고 일하는 이상 직장인은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다. 실력 있으면서 예의 바른 사람, 친절하지만 단호한 사람들이 멋진 프로다. 말은 쉬운데 쉬운  아니다.

(202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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