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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태진 Dec 16. 2019

워라밸

Lesson #3. 전력 투구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서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 가방만 던져놓고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뒤뜰의 넓은 잔디밭과 놀이터에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큰 소리로 깔깔거리며 몰려다니는 아이들의 무리가 항상 있었는데 서현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골수 멤버(?) 중의 하나였다. 한 번은 해가 진 후 밤늦게까지도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경찰이 출동하고 애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가 난 적도 있다. 새로 사귄 친구네 집에 가서 정신없이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서현이는 그동안 집에서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는 펑펑 울며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빌었었다.

가끔 접하는 한국 뉴스에서 한국의 사교육 열풍에 대해 읽을 때, 특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조차도 사교육 때문에 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아이로서의 삶(childhood)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는 그 어린이들이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공부만 강조하느라 그 나이에 당연히 가져야 할 경험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서현이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학교를 다니는 서현이는 한국의 또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 비하면 여전히 더 많은 자유와 여가를 누리고 있는 편이긴 하나, 캄캄한 새벽에 등교하고 각종 project와 숙제, 시험 준비 등으로 새벽 1-2시까지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아직도 놀기 좋아하고 늦잠 자는 것 좋아하는 서현이지만 엄마의 잔소리가 없어도 알아서 새벽같이 일어나고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끙끙대는 걸 보노라면 쟤가 그렇게 놀기 좋아하던 우리 딸이 맞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한국에 와서 보니 ‘워라밸’이라는 신조어가 화두이다.  영어로 “워크 라이프 밸런스 (Work-Life Balance)”라는 표현이 있긴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 이 말이 특히 많이 회자되는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로자의 근무시간은 OECD 국가들 중 두 번째로 길다고 한다. 사람이 죽기 전에 가장 많이 하는 후회 다섯 가지 중 하나가 ‘너무 일만 하면서 인생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라는데, 한국에는 그런 후회를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지 않을까 싶다.  나도 미국에서 일할 때 일 년의 거의 절반을 출장을 다닐 만큼 바쁘게 일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일만 하느라 아이들 크는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워라밸’ 담론을 보다 보면 가끔 갸우뚱할 때가 있다. 문제의 본질이 약간 흐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마치 ‘일(work)’과 ‘일을 제외한 나머지 삶(life)’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5:5로 나누어야 비로소 균형(balance)이 맞다는 듯 절대적인 시간에만 초점을 맞추어 워라밸을 이야기하는 것은 진정한 ‘워라밸’ 논의의 본질에서 다소 벗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균형이 맞다’고 할 수 있는 비율이 7:3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비율이 4:6일 수도 있지 않을까?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때는 일이 전부인양 일에 올인 (all in) 하려는 시기가 있다가도, 시간이 가고 처해 있는 상황이 바뀌면서 그 비율이 조금씩 바뀌어 가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나에게는 절대적인 시간의 분할 (split) 보다는, 그 분할 (예컨대 5:5가 될지, 6:4가 될지, 혹은 3:7이 될지)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어머니는 나에게 ‘사람에게는 때가 있는 법’이라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갑자기 때밀이 타월이 생각나네 -.-;;) 놀 때가 있고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서현이가 한창 놀 때가 있었고 지금은 열심히 공부할 때가 된 것처럼.

비행기는 이륙하기 전에 활주로 위를 달릴 때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고 한다. 만일 활주로 위에서 전력질주 하지 않고 주춤주춤 달리게 되면 비행기는 제대로 뜨기 힘들다. 우리 나이 20, 30대도 활주로 위를 달리는 비행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꼭 20, 30대일 필요는 없지만) 전력질주가 필요한 시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 전력질주가 필요한 때라고 판단하고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내가 그 당시에 일에 쏟는 물리적 시간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나의 ‘워라밸’의 좋고 나쁨을 다른 사람이 단순하게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만일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단지 조직의 분위기나 상사의 눈치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밤늦게까지 남아 있으라고 하거나, 주말에도 사무실에 들러서 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워라밸’의 불균형이자 침해이다. 혹은 정말 절대적인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본인이 원하지 않음에도 늦게까지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 역시도 워라밸에 대한 정당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이런 고민은 상당 부분 회사 또는 사회적으로 논의되고 해결될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요즘 많은 회사들이 유연근무제 등을 통해 직원들 스스로가 자신의 업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제도와 더불어서 그런 제도를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성숙된 문화를 갖추는 것 역시도 중요하다.



최근에 공휴일과 주말을 끼고서 출장을 다녀왔다. 남들이 쉴 때 나는 일한 셈이다. 그리고 글로벌 회사에서 일하다 보니 퇴근했다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 유럽에 있는 동료들과 전화로 회의를 하느라 밤늦게 혹은 이른 새벽에 일하는 것도 다반사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고, 마음에 안 들면 (먹고 살일이 고민이긴 하겠지만) 그만두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다행히도 나는 바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지금 하는 일이 보람 있고 내 일과 삶에 대한 통제권을 내가 잃지 않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내가 일에 쏟는 시간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나의 워라밸에 만족한다.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일과 삶의 균형’이란 일과 삶 사이에 투입되는 ‘시간의 균형’보다는,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을 내가 갖고 있는가’와 ‘그 자율성 속에서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감수할 것인가’ 이 두 가지 사이의 균형(balance) 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와 기업들이 그런 자율성을 더 많이 부여해 주면 좋겠다.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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