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2일 (목요일), 흐림
바이오 제약업계 최대의 연례행사인 BIO USA. 전 세계에서 제약 바이오 사업을 한다 하는 웬만한 회사들은 다 모이는 만큼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행사장 안은 여기저기 바쁘게 쫓아다니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나도 바쁘게 한 회사와의 미팅을 마치고 다음 약속 장소를 향해 군중 속을 정신없이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내 팔을 낚아챘다. ‘누구지?’ 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붙잡은 사람을 쳐다봤다.
”Hey~ Justin~! “ (이봐, 태진!)
‘Justin’은 내가 유학 당시에 쓰던 영어이름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다시 한국이름을 썼기 때문에 나를 영어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시절 같이 공부했던 외국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팔로 잡아챈 사람은 내 미국 친구 M이었다.
”Great to see you! How are you? “
(야, 진짜 반갑다. 잘 지내?)
그는 나를 복도 한쪽으로 비켜서게 한 다음 그동안 잘 지냈는지, 회사는 별일 없는지 등 내 안부를 친절하게 물었다. 우리는 둘 다 다음 약속을 위해 이동하던 중이라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복도에 서서 잠시라도 안부를 주고받고 기념으로 셀카도 함께 찍을 수 있었다.
짧은 조우였어도 M과의 만남은 그 후 한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M은 그 정신없는 와중에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나를 알아봤을까? 그리고 어떻게 나를 붙잡고 안부를 주고받을 생각을 했을까?’
곱씹어 볼수록 신기했다.
사실 M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약회사들 중 한 군데에서 사업개발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라있다. 우리 동기들 중에 ‘엄청 잘 나가는’ 친구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한 명인 것이다. M과 나는 학창 시절에 친하게 어울려 노는 무리가 서로 달랐고, 그래서 유학시절 내내 그와 그리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M이 나에 대해 크게 호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솔직히 나중에 그 친구가 업계 거물이 된 것을 알고 나서 ‘학교 다닐 때 좀 더 친하게 지내둘걸’ 하는 얄팍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먼저 나를 알아봐 주고 자상하게 안부까지 물어봐주니, 한편으로는 감격(?)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쟤는 사실 나에 대해 호감이 있었는데 내가 지레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 아냐?‘라는 궁금증도 들었다.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또 다른 대형 제약사의 거물이 되어 있는 친구 D이다. 이 친구도 역시 학교 다닐 때 나하고 엄청 친하게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마침 부탁하고 싶은 사안이 생겨서 혹시나 하고 무척 오랜만에 연락을 했을 때 의외로 아주 반갑게 대답해 주었다. 고마워서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와튼스쿨(The Wharton School)에서 협상학을 가르치는 심리학자 Gus Cooney 교수는 2018년에 발표한 <The liking gap in conversations: Do people like us more than we think? (대화중 호감도의 차이: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좋아하는가?)>라는 논문에서 'Liking Gap (호감도 차이)'이라는 현상을 소개한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후에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얼마나 호감을 갖고 있을 것 같은지를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 상대방이 나에 대해 느끼는 것보다 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대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머릿속에 곱씹어볼 때 자기 자신이 했던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잘 기억하는 반면, 상대방이 했던 긍정적인 말이나 행동, 표정은 의외로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대화 중에 어떤 멍청한 실수를 했거나 어색한 순간을 만들었다면 이런 것들은 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어서 ‘내가 대화를 망쳤다’ 거나 ‘좋은 인상을 못줬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에 상대방이 대화 중에 느꼈던 나에 대한 호감의 작은 신호들에 대해서는 잘 눈치채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그 사람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라는 잘못된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호감도 차이 (Liking Gap)’는 내 주변에 무척 흔했다. 새로 영입했던 임원 한분은 입사 후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나와 면담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나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척 불안해했다. 사실 나는 그 임원을 영입한 이후로 회사에 긍정적인 변화가 많아서 평소 그에 대해 무척 만족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에 대한 나의 평가를 염려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하시죠? 저는 OO님이 오시고 나서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그 임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능력을 인정받아 새로운 보직을 받았던 간부 직원 A도, 다른 부서에 보내서 새로운 경험을 쌓게 했던 젊은 인재 B도 다들 한 번씩은 비슷한 감정들을 가지는 것 같았다. 나와의 면담이나 커피챗 때면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요? “라고 불안한 눈빛으로 내게 물어보았던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다. 특히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사업의 기회를 모색해야 하는 업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이번 국제행사에는 어떻게든 글로벌 사업기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한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출장을 왔다고 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30분 단위로 쉬지 않고 미팅을 했다는 분들도 여럿 있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나서 여기저기서 리셉션 자리가 열렸다. 여기서 만났던 몇몇 분들은 열심히 준비해 온 것에 비해 실제 미팅의 성과가 높지 않았던 것 같다고 우울해하기도 하셨다. 나는 그분들이 그 짧은 시간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을지 아닐지 너무 고민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좀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생각보다 나를 좋게 봤을 가능성이 더 높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