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3일 (토요일), 맑음
26년 지기 친구들, 첫 직장의 입사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최근 창업한 Y의 머리가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더 하얗게 샌 것 같았다.
”야, 넌 회사 차리더니 고생이 많은가 봐? 머리 염색은 안 해?”
“응, 난 일부러 안 해.”
“그래? 하긴 너는 오히려 머리가 하얀 게 더 멋있긴 해.”
반면에 옆에 앉은 H의 머리는 상대적으로 더 검었다.
“넌 어때? 넌 염색한 거야?”
그랬더니 이 친구 멋쩍게 웃으면서 하는 말,
“나? 나는 흰머리도, 검은 머리도 별로 없어서, 뭐 ㅎㅎㅎ”
그러고 보니 H는 머리숱이 나머지 친구들보다 좀 적긴 하다. 우리의 수다는 ‘머리 심는 게 효과가 있네 없네’, ‘머리 심으려면 돈은 얼마나 드네’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함께 수다를 떠는 와중에 H는 왠지 민망한지 괜스레 손으로 머리를 계속 쓸어내리는데 그의 표정이 좀 미묘하다. 학벌 좋고 인물 좋고 직업도 좋아 이래저래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아 보이는 H에게도 머리숱은 일종의 콤플렉스였던 모양이다.
사실 그 자리에 있는 우리 각자는 알게 모르게 다들 콤플렉스를 한두 개씩 갖고 있었다. 멋진 백발을 자랑하는 Y는 내로라하는 회사들에서 경험을 축적한 후 창업한 업계 베테랑이지만, 박사학위가 없다는 것이 콤플렉스인 모양이었다.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을 때면 괜스레 주눅이 들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박사학위가 있는 친구는 머리숱이 없어 아쉽고, 머리숱이 많은 친구는 박사학위가 없어서 아쉽다.
나도 콤플렉스가 있다. 사실 한두 개가 아니다. 여럿 있다. 키도 더 컸으면 좋겠고, 목소리도 더 중후했으면 좋겠다. 심지어는 내 성(last name)씨가 영어로 "Ham"인 것도 콤플렉스다. 간혹 외국 친구들이 놀린다.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최초 아시아계 여성 종신교수인 문영미 교수는 저서 <Different – Escaping the Competitive Herd>에서 단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약점이나 특징을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차별화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어떻게든 채우고 없애려고 한다는 것인데, 모두가 그렇게 하다 보면 다들 개성이 없이 비슷비슷해져서 결국 차별화에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단점이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면 차별화에 도 성공할 수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Google, IKEA, MINI Cooper 같은 브랜드가 그러한 예라고 한다. Google은 온갖 정보를 제공하는 다른 검색 포털들과 달리 백지장처럼 아무것도 없이 하얀 바탕에 검색창 하나만 달랑 있는 웹사이트로 차별화했고, IKEA는 완성된 가구를 친절하게 배달해 주는 기존 가구업체들과 달리 완성도 안된 가구 부품을, 그것도 소비자가 직접 차에 싣고 집에 가져가서 끙끙거리며 조립하게 하는 불친절한(?) 서비스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MINI Cooper는 덩치 큰 자동차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시장에서 ‘우리 차는 진짜 진짜 진~~ 짜 작다!’라고 거의 자기 비하하는 듯한 광고로 소비자에게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단점을 장점으로, 약점을 차별성으로 승화시키는 면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여성이 있다. “How Do You Define Yourself?”라는 강연으로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Lizzie Velasquez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몸에 지방이 전혀 쌓이지 않는 희귀병으로 인해 성인이 된 후에도 체중이 29kg을 넘지 않았는데, 병에서 기인한 특이한 외모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심한 조롱과 놀림을 받았다. 특히 17살 되던 해에는 누군가가 그녀의 모습을 “세상에서 제일 못생긴 여자(World's Uggliest Woman)”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렸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가 죽어라’라는 식의 악의적인 댓글을 다는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의 그런 부정적인 시선이 자신을 무너뜨리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당당하게 대중 앞에 나선다. 그리고 2014년의 TED 강연에서 “당신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What defines you?)"라는 돌직구 질문을 날린다. 그녀는 남들이 생각하는 잣대로 자기 자신을 평가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지금도 그녀는 저술가, 강연자, 인플루언서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
결국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추거나 없애서 “극복”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콤플렉스는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할수록 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우리를 스스로 더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남들에게도 나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된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들에게서 그 점을 확실하게 배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서였다. 행사가 진행되는 단상 머리 위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졸업생들의 ‘Six-Word Memoir’가 차례차례 비치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예전에 졸업 앨범에 쓰던 ‘나도 한마디’ 같은 것이다. 다만 반드시 여섯 단어로만 써야 한다는 게 규칙인 모양이다. “Success seems fun. Maybe I'll try. (성공하면 재미있을 것 같네. 한번 해봐야지.)” 같은 모범생 스타일도 있고, “I don't know what I'm doing.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같은 솔직한 스타일도 있다. 아들의 차례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데 짜잔~하고 나타난 아들의 문구...
“Yes, my last name is Ham. (맞아, 내 성은 Ham(햄)이야)”
빵 터져서 웃고 있는 다른 학부모들과 달리, 나는 잠시 얼어붙어서 아무 반응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조금 정신이 들고나서부터 나도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마 아들도 나처럼 이름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깨나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빠에겐 ‘콤플렉스’였던 그것을 아들은 당당하고 가볍게 웃어넘기는 모습을 보자니 아들이 그토록 대단하고 대견해 보일 수가 없었다.
Lizzie처럼, 아들처럼, 남들이 뭐라 하건 나는 나를 사랑해 줄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남들의 시선에서 나를 재단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쩌면 때로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지혜이고 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