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책임과 견딤
영업자 G는 오늘따라 각오가 남다르다. 신간이 출간되었고 이번 책은 회사에서 특별히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다른 출판사와 작업을 하던 작가를 어렵게 섭외해서 데려왔고 함께 일하던 편집자와 계속 일하고 싶다는 작가의 요구를 수용해 편집자도 함께 데려와 작업했다. 꼼꼼한 성격의 작가는 표지와 제목, 홍보방안까지 일일이 체크하며 회사를 압박했다. 회사 역시 충분한 돈을 준비하며 홍보를 위한 총알을 비축했다. 그만큼 책을 팔 수 있는 힘이 있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공들인 책이 출간되었다.
G는 준비한 종이가방에 책을 가득 넣고 서점으로 출발할 참이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G의 몫이다. 안 팔릴 것 같은 책을 파는 게 영업자의 역할이고 1만 부 팔릴 책을 10만 부 파는 게 또 영업자의 역할이니까. G의 가방에는 책과 함께 서점에 뿌릴 보도자료가 가득 담겨 있다. 책과 보도자료를 칼과 방패처럼 들고 섰다. 전장에 나선 기사의 심정과 다를 바 없는 각오를 하고.
영업자들의 주 무대는 서점이지만 그들이 다녀야 하는 곳은 이 외에도 수없이 많다. 언론사는 물론 각종 총판, 출판 관계자, 도서관, 때론 기업과 파워 블로거들도 만나야 한다. 그들의 전장은 셀 수 없으며 어디서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함께 전쟁에 참여한 다른 출판사의 영업자들 역시 치열하게 자신의 책을 홍보하니 주어진 시간 안에 신간의 매력을 충분히 어필해야 한다. 더구나 홍보할 수 있는 인터넷 영역이나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는 한정되어 있고 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으니 경쟁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론 온갖 반칙과 배신, 술수가 난무하는 전장이 되기도 한다.
다행히 이번 책은 작가의 인지도와 영향력이 적지 않아 서점 담당자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대신 많이 팔릴 책임을 어필하며 얼마나 좋은 홍보 영역을 얻어내는 가가 G의 역할이다.
"경품이 좀 있으면 더 잘 나갈 거 같은데."
경품 맡겨둔 사람처럼 얘기할 때면 도둑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작가가 워낙 유명해서 굳이 경품이 없어도 될 거 같긴 한데."
G는 X서점의 K를 특히 싫어한다. 늘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회사의 홍보 영역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담당자가 있기 때문이다. 늘 줄담배를 물고 사는 그를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함께 담배를 태워야 하는데 그것도 고역이다. 세상에 대한 불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세상 모든 걱정이 다 자기 것 마냥 늘 심각한 얼굴이다. G는 K의 굳은 얼굴을 또 어떻게 풀어야 할지 시작부터 난감하다. 무엇보다 언제 봤다고 자꾸 반말인지 자꾸 거슬린다.
"먹고 살만 한가?"
"덕분에 겨우 먹고 살죠."
"뭐 또 새로 나왔나 봐."
"저희도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하하."
"요즘 다들 책을 왜 그렇게 내는 거야. 바빠 죽겠어."
"다들 먹고 살려다 보니. 하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생사가 달려 있으니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영업자 G의 미소 띤 얼굴 뒤에 숨은 비장함은 좀처럼 숨길 수가 없다. 비장함이 스멀스멀 전염되어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도 한다.
영업자들이 서점의 담당자를 설득하는 방법은 수없이 다양하다. 꾸준히 쌓아온 친분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고 책에 대한 자부심으로 다가오기도, 또 때론 힘든 형편을 이야기하며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제법 힘이 있는 출판사 영업자라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어디까지 홍보해 줄 수 있냐고 간을 보며 다가가는 경우도 있다. 저마다의 전략은 다르지만 다들 열정적으로 자신의 책을 홍보하고 경쟁한다.
G의 방법은 꾸준히 쌓아온 친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늘 환하게 웃어야 하고 어쭙잖은 잔소리, 갑질 등을 받아줘야 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제법 든든한 친분을 쌓아두면 적은 돈으로 의외의 홍보 기회를 얻을 수 있어 얻는 이득이 크다.
G는 아침부터 저녁 해가 질 때까지 온갖 서점을 다니며 책을 돌렸다. 준비한 책과 보도자료도 동이 났고 이제 마지막으로 직접 책을 구매하는 일만 남았다. G는 늘 책이 출간되면 여러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돈으로 출간된 책을 한 권씩 샀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한 혼자만의 경건한 의식이다. 마치 운동선수가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수염을 깍지 않고, 혹은 애인의 속옷을 입고 경기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비슷한 심정이다. G는 책이 잘 팔려 꼭 베스트에 오르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기도하며 매번 책을 샀다. 이른바 '첫 게시'를 하는 거다. 영업자 초창기 시절, 다음 날 판매 부수를 확인하고 '0권'이라고 적혀 있는 보고서를 사장에게 가져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짓'이다.
"G대리. 어제 팔린 한 권이 G대리 이름이던데."
"동명이인입니다."
"그렇지? 거 참 신기해. 동명이인이 책을 그렇게 사주고. 완전 행운이다 행운."
학교 다닐 때야 경쟁은 그저 경쟁으로 끝나고 기껏해야 자존심이 상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 문제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게 더 큰 문제다. 영업자 G의 어깨에는 출판사의 수많은 직원들의 기대와 격려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의 밥그릇도 함께 달려 있으니 이건 좀 심한 것 같기도 하다.
K서점, Y서점, A서점, I서점 등의 인터넷 사이트를 돌며 책 구매를 마친 G는 자신의 돈 12만 원을 썼다. 많지 않은 월급에 적지 않은 타격이지만 마음은 편했다. 이제 며칠 뒤 책이 집으로 배송되면 주위 친구들에게 선물로 줄 생각이다. 종종 이렇게 책을 선물로 주며 선물을 핑계로 술을 얻어먹는다. 따지고 보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책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몇 권 더 사서 주위에 선물 좀 해라."
"책은 그냥 장식용으로 쓰는 거지, 읽는 거 아니다."
"그럼 장식용으로 사서 줘."
"한 두 권으로 장식이 되겠냐."
"그러니까 왕창 사서 선물해."
다행히도 G의 친구들은 출판계에서 일하지 않는다. 돈 잘 버는 대기업에 다니고 사업에 성공한 대표도 있으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회사를 물려받은 친구도 있다. 술 좀 얻어먹어도 전혀 부담이 없는 '좋은' 친구들이다. 이렇게 매달 책과 술의 물물교환이 이뤄지고 G는 요즘 들어 친구들이 점점 더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