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투샷의 위험함

단순하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게 사랑이다

by 윤태진


박 대리는 늘 회사 근처의 M커피숍을 간다. 커피에 대해 별 취향이 없는 나는 그냥 가자면 따라가는 편이다. M커피숍은 아메리카노를 투샷으로 준다. 때문에 카페인에 약한 나는 늘 원샷으로 연하게 타 달라는 추가 주문을 해야 한다. 종종 추가 주문을 깜빡하고 투샷 아메리카노를 마신 날이면 오후 내내 심하게 각성된 상태로 심장을 벌렁거리며 일을 하게 된다. 덕분에 키보드를 쉴 새 없이 두드리며 몇 배로 열심히 일을 하게 되지만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그날 역시 버릇처럼 M커피숍으로 향했다. 오전에 커피를 마셔 뭔가 다른 것을 마실까 잠시 고민해봤지만 주문을 기다리는 바리스타에게 미안해 버릇처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상냥한 바리스타가 미소를 머금으며 다시 주문을 확인했다.


“원샷으로 드리면 되죠?”

"원샷인데 물을 좀 많이 타 주세요. 더 연하게."


함께 간 박 대리는 세련된 서울남자라 커피를 즐겨 마신다. 에티오피아니 콜롬비아니 브라질이니, 이런저런 커피를 구분해 마시는 걸 보니 커피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눈치다. 더구나 아주 진한 커피를 즐겨 마신다. 아침에는 에스프레소를, 점심 후에는 투샷도 모자라 쓰리샷을 요구할 때도 있다. 사약같이 진하고 쓴 커피를 마시는 박 대리를 조금은 존경스러운 눈으로 훔쳐본 적도 있다. 그렇게 진하게 마시면 어지럽지 않냐는 말에 박 대리는 두르고 온 스카프를 풀며 어깨를 살짝 들썩일 뿐이다. 그에게서 서울 남자 특유의 여유(내가 느끼기에)가 풍긴다. 특유의 상냥함과 부드러움도 있다. 그렇다고 성격이나 인성까지 상냥한 것 같진 않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렇게 보인다. 다행히 박 대리는 착한 남자다. 다만 여자를 많이 좋아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모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지만 박 대리는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걸 슬며시 얘기해주고 싶다. 7살에 부산으로 이사를 갔으니 좀 애매하게 살긴 했지만 누가 뭐래도 내 고향은 서울이다. 검정치마가 부른 ‘내 고향 서울엔’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 고향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얼었던 내 마음도 열 틈 없이. 내 사랑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쌓여도 난 그대로 둘 거예요.’


가사처럼 올해도 출판단지에는 많은 눈이 내리겠지. 그러고보니 여긴 서울이 아닌 파주구나.

졸린 눈으로 빨대를 빨고 있는 나를 보며 박 대리가 눈치를 보며 묻는다.


“저 알바한테 반한 것 같아요?”

“알바치고는 꽤 오래 일하는 거 같은데.”

“저 친구 보러 다들 얼마나 오는 줄 알아요? 일종의 영업이겠죠.”


커피숍이 처음 문을 열면 처음 한 달은 일부러 모델과 같은 바리스타를, 물론 더 비싼 월급을 주며 고용한다는 것은 들은적이 있다. 여자 손님은 모르겠지만 남자 손님의 관심을 끄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맛도 가격도 아닌 어쩌면 바리스타의 외모 일지 모른다. 사실 남자들은 둘러앉아 늘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 가게 알바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전에 있던 그 예쁜 알바 그만뒀나? 여자들끼리도, 역시 잘생긴 남자 알바를 보며 나름의 품평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그렇다(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누구에게나 확인 불가능한 ‘좋은 시절’이 있다. 물론 나에게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득한 옛날이고 참 편하게 살던 날들이기도 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친구들과 광안리 백사장에서 모이곤 했다. 그때 우리는 사랑은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 모른다는 운명론에 심취하여 백사장을 거니는 거의 모든 여자들에게 ‘고백’을 했다. 고백의 성공률이 높지는 않았지만 고민 없이 다가가 늘 당당하게 말을 걸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젊음의 무모함은 찰나의 순간에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그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듯 나 역시 그 순간이 그립다.

그때는 사랑 역시 단순했다. 그리고 이제 사랑은 결코 단순할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단순하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게 사랑이다.


커피를 마시며 관심 없는 척 흘깃 미녀의 바리스타를 훔쳐보는 박 대리의 모습을 보며 용기 내어 고백하라고 조언했다. 사랑 앞에 장애물은 없다고. 그가 유부남임에도 용기 내어 고백한다면 단순한 짝사랑은 순식간에 복잡복잡복잡복잡한 사랑이 될 것이다. 단순했던 풋사랑의 감정은 분노와 갈등, 오해와 증오로 폭발적인 확장을 일으키게 될 것이고.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지며 눈덩이처럼 불어나 알고 보니 커피숍 알바가 우리 회사 사장의 숨겨둔 애인으로 모텔에서 나오는 걸 누군가 봤고, 박 대리는 삼각관계에 휘말려 회사에서 잘리고 말았다는 지경에 이르고 말지도 모른다...

터무니없는 상상이 끝날 줄 모르고 퍼져나간다. 지금 마시는 아메리카노가 어쩌면 바리스타의 실수로 투샷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커피가 때로는 이렇게나 위험하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박 대리가 날 바라본다. 이 아저씨 또 정신 나간 소리 하네 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 표정이다. 조금씩 심장이 벌렁거리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아메리카노 투샷이었던 게 분명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기에는 조금 쌀쌀한 날씨인 것 같은데, 얼음이 가득 담긴 컵을 든 박 대리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용기 따위 필요도 없었을 거예요."


다시 한번 속으로 생각했다. 단순하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게 사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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