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그런 재주가 없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집중이 안 될 때면 출판단지 이곳저곳을 걷곤 한다. 갈대샛강 주변을 걷기도 하고 보기 좋게 세워진 건물들 사이를 거닐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 건물의 주인들은 참 부자겠구나. 부럽다.’ 따위의 생각이 든다.
대체 이런 건물들은 얼마나 할까? 내가 가진 전 재산을 다 모으면 여기 있는 건물의 방 하나 정도 살 수 있으려나? 요즘은 건물주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하던데 대체 언제부터 건물주가 직업이 된 거지? 심지어 몇몇 초등학생들은 꿈이 건물주라고 하는데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가 아닐 수 없다. 부동산 값은 늘 오른다고 하는데 저들은 앉아서 수억 원을 벌고 있겠구나. 비교하지 않고 싶지만 나는 일 년 죽도록 일해 천 만원을 저축하면 다행인데 슬픈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니 돈에 대한 고민이 커진다. 지금까지 해온 고민과는 차원이 다른 고민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그저 막연히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고 나니 이건 진짜 전쟁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 굶어 죽지 않기 위한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전쟁. 난 평화주의자라 전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 등 떠밀려 전장 한가운데 서 있는 형국이다. 어쨌든 나온 전장이니 살고 봐야 한다. 내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전체의 안위가 달린 심각한 문제이니 지금까지처럼 대충은 절대 안 된다.
출판계는 연봉이 높은 직군이 아니다. 직업별 연봉 평균을 보면 출판계는 중위권과 하위권 사이에 위치해 있다. 더구나 출판계는 늘 먹고살기 힘들다고 한다. 실제로 문을 닫는 출판사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고 출간되는 책의 절대적 양 또한 예전 같지 않다. 오 천부, 만 부씩 1쇄를 찍었던 관행도 이제는 이 천, 삼 천부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 연봉이 기적적으로 높아질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출판인들이 박봉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능력 있는 편집자나 마케터는 높은 연봉에 스카우트되기도 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두둑한 보너스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그들 역시 결국 출판동네 사람들이니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다. 금융업이나 대기업 또는 ‘사’ 자 돌림 직업인들에 비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비슷한 월급을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는 출판계 동지들을 볼 때면 뜨거운 전우애를 느낀다. 다들 어떤 노하우로 경제적 부족함을 극복하고 있는지 듣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돈도 요령 있는 사람이 번다. 운동에 소질 있는 사람이 있고 공부에 소질 있는 사람이 있다. 말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고 노래를 특출 나게 잘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당연히 돈 버는 것 역시 잘 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돈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돈이 벌리는지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재주가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요령 있게 재테크를 하며 돈이 돈을 벌게 한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뒤처지고 싶지도 않으니 매 순간순간이 고뇌의 시간이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의 팀장이 그랬다. 돈을 모으려면 돈을 적게 써야 한다고. 이 무슨 배고프면 밥을 먹으라는 것과 같은 당연한 말을 하는 거냐며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나이가 들며 돈 쓸 일은 계속 많아지고 아이가 생기니 정말 돈을 물 쓰듯 쓰게 된다. 설거지할 때도 흐르는 물을 아까워하며 설거지하는데 돈을 물 쓰듯 하다니 아이 키우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러면 이제는 돈을 얼마나 지혜롭게 쓰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다시 말해 돈을 어떻게 아껴야 하는지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집중해봐야 특별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워낙 수에 약한 체질이라 계산이 되질 않는다. 계산기를 열심히 두드리며 엉터리 계산법으로 이율과 금리를 계산하고 있으니 아내가 한심하게 쳐다본다. 이런 가장에게 돈을 맡겨도 되는 걸까 의심이 가득한 눈빛이다.
“난 나름의 계산법이 있어. 난 수학 시험에서 찍었는데도 반을 맞춘 사람이야.”
변명하듯 아내에게 말하며 생각했다. 수학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고. 그때 포기하지 않았으면 지금은 좀 다른 모습일지 모른다.
문뜩 십여 년 전 우연히 명동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 놈이 떠올랐다. 그때 난 언론사에서 인턴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연말연시 명동 분위기를 취재하는 중이었다. 취재 도중 명동 한복판에서 익숙한 얼굴의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산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가며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다. 친구는 볼에 살이 포동포동 올라 처음에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고등학교 동창임을 알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때 친구는 번듯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역시 번듯한 정장을 입은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 나는 청바지에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즐겨 쓰던 빈티지 스타일의 모자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디서 일하고 있냐고 물었고 친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S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맞다 신한은행이다. 물론 공부 잘하던 친구였음은 두말하면 잔소리고.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학에 여유롭게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친구는 역시 좋은 직장을 얻은 것이다. 그때는 아직 어릴 때라 은행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안정적으로 부자가 되는 몇 안 되는 선망받는, 직업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긴 몰라도 그 친구는 지금쯤 내가 가진 전 재산의 몇 배는 보유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친구는 나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기까지 했다.
역시 수학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수학이라도 꼭 붙들어 잡고 있어야 했던 거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부자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싶다. 마음이 부자야 진짜 부자라는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치고 실제 돈 없는 사람 못 봤다. 또 돈 싫어하는 사람은 더욱 못 본 것 같다.
돈이 있고 덕분에 여유가 생겨야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여유 있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래도 난 부자가 되어야겠다. 방법을 모를 뿐 목표는 명확하다. 목표라도 명확하니 다행이다. 뭔소리를 하고 있는지.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또 말뿐이다. 그냥 방에 누워 스릴러 소설을 펼쳐 들고 몇 시간째 읽는다. 돈을 벌겠다는 각오 따위 까맣게 잊고. 거실에선 아기들이 멈출지 모르며, 뛰어놀고 있다. 아내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곤히 잠들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모습. 돈 버는 건 하루 더 미루기로 한다. 그러다 다시 불안하면 희망찬 미래를 다짐하고, 또 귀찮아하고.
매일 이러기를 반복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