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든 발생하고 마는 사랑

삭막한 출판단지라고 사랑까지 없을 순 없다

by 윤태진

외근을 다녀와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하다. 사람들이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소곤거린다. 호기심에 선배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내부 CCTV에 아르바이트 학생 둘의 애정행각이 찍혔다는 것이다. 물론 둘은 CCTV가 있는 줄 모르고 은밀한 사랑을 속삭였다.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담당자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렇게 소문이 돌 정도면 제법 뜨거웠던 것 같다. 젊은 혈기에 장소는 문제도 아니었겠지. 제한된 공간, 얽매인 시간이 그들을 더욱 달아오르게 했을 것이다. 달콤함이라곤 봉지 커피 속 설탕 알갱이가 전부인 이곳에서 이런 훈훈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대체 그 수위는 어느 정도였을지를 하루 종일 궁금해하며 두 아르바이트생을 응원했다.

그렇게 그들의 비밀 연애는 들통이 났고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는 적당한 훈계가 주어졌다고 들었다. 하지만 부끄러워서였는지 혹은 더 좋은 직장을 구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둘은 차례로 회사를 떠났다. 이후 둘이 계속 만났는지는 모른다. 각자 다른 직장에서 또 다른 각자의 연인을 만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 청춘들이니 알아서들 사랑하고 있겠지. 그 충동적인 사랑이 부럽다. 사랑이 아니라 ‘충동’이.


사랑은 어디서나 발생하기 마련이다. 삭막한 출판단지라고 사랑까지 없을 순 없다. 아니 어쩌면 삭막하기에 더 손쉽게 사랑에 빠지고 있을지 모른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야근에 없던 정도 생기고, 미운 정 사이로 은근한 사랑이 비집고 튀어나온다. 느닷없이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서 핑크빛 물결이 엿보인다. 작가와 작가의 사랑, 작가와 이를 다잡아주는 편집자의 사랑, 편집자와 마케터와의 사랑, 마케터와 독자와의 사랑, 독자와 작가와의 사랑, 작가와 평론가와의 사랑, 평론가와 독자의 사랑.

출판단지를 삭막하다고 했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어느 늦은 밤, 출판단지 내 버스정류장


겉으로는 언제나 지친, 시크한 표정의 그와 그녀들이 언제 사랑을 불태웠는지 궁금해진다. 사랑이 꽃피는 출판단지를 보며 숨은 사랑은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흔한 사랑이 그렇듯 시작은 버스정류장이었다. P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과 동시에 튀어나왔지만 같은 마음의 출판인들이 벌써 길게 줄을 늘여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P는 줄지어 선 사람들을 세며 과연 나에게도 앉을 기회가 남아 있을지 조심스럽게 예측해 봤다. 아무래도 나를 위한 좌석은 남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P는 편집자다운 꼼꼼한 성격으로 휴대폰을 꺼내 합정까지의 도로 상황을 살폈다. 붉게 물든 실선이 자유로의 여정이 험난할 것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피해갈 도리가 없었다. P는 어쩌면 나를 위한 한 좌석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보이지 않는 버스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그때 H가 다가왔다. 다가오는 H를 반가워할 겨를도 없이, H는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곤 미련 없이 돌아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앉아가진 못해도 H와 같은 버스를 탈 수 있다면 그걸로 보상은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P는 당황했다. 다가오는 버스를 포기하고 P는 H를 쫓아 걸었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내리는 비에 감성이 충만해져서였던 것 같다. P는 서둘렀다. 아끼던 스니커즈 신발이 물에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고인 물을 첨벙첨벙 밟으며.

신호등 앞에서 초록 불을 기다리던 H옆에 선 P는 드디어 용기를 냈다. 업무를 핑계로, 언제 한번 먹자던 밥을 오늘 먹는 건 어떠냐고. P의 제안에 H는 밥보다는 영화가 어떠냐며 되물었다. 마케터다운 넉살로, 용기 낸 P를 편안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게 둘은 출판단지 끝자락에 위치한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 극장에는 P가 편집하려다 못한 소설이 영화화되어 개봉 중이었다. 계약을 앞두고 다른 출판사가 낚아챘던 소설이었다. 이후 그 소설과 관련된 어떤 것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H가 보자니 두말 않고 표를 끊었다.


"혼자 보는 책 보다 함께 볼 수 있는 영화가 더 매력 있는 것 같아요."

"먹거리를 위협하는 농담이네요."

"아... 네..."

"그래도 책이 없어지진 않겠죠."

"좋은 책은 어떻게든 사랑받긴 하니까요."

"만드는 책들 찾아보고 있었어요."

"아 보셨어요..."

"안 팔리면 말하세요. 제가 책을 좀 잘 팔거든요."


H의 격려에 남자는 얼굴이 붉다 못해, 타올랐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랑 따위 흔적도 없던 이곳 쓸쓸한 출판단지의 밤이 느닷없이 사랑으로 달아오른다.

평일 저녁 다들 서울로 떠나기 바쁜 저녁시간에 출판단지 안의 극장을 찾은 이들은 누구일까 궁금했었다. 그들은 듬성듬성 앉아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하나의 빨대로 콜라를 홀짝였다. 끝자락 파주에도 사랑은 있었다. 사람도 있고 사랑도 있고.

그러고 보니 출판단지 구석진 곳에 위치한 모텔 몇 개가 생각났다. 좀처럼 장사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는데, 역시 수요가 있었던 거다.

극장에 앉아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을 상상하며 느닷없이 뜨거운 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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