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이 살벌한 걸 보니 내가 요즘 뭔가 많이 억눌려 있나 보다
어린 시절을 따뜻한 부산에서 보냈다. 덕분에 눈 보는 게 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가끔 눈이 내리기라도 하면(사실 흩뿌린 정도였지만)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 강아지 마냥 흥분해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눈을 먹겠다고 입을 벌리고 냠냠거렸다. 먼지와 각종 이물질이 가득한 ‘산성눈’이었을 텐데 말이다. 뭉쳐지지도 않는, 얼핏 먼지로 보이는 눈을 겨우 뭉쳐 친구와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눈이 부족해 흙을 조금씩 섞어야 했지만 그때의 우리는 진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흙 싸움’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걱정스러웠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닌 유년시절이었다. 동네 유난히도 많았던 쥐를 생포해 키우겠다고 신발 상자에 가뒀다 잃어버려 큰 사달이 나기도 했고, 무당벌레를 모았을 때는 무당벌레가 뿜어낸 액체로 집안 곳곳이 노랗게 물들기도 했다. 온갖 세균이 가득하다는 비둘기를 방에서 몰래 키웠던 일은 지금도 부모님껜 비밀이다. 비둘기로 편지를 전할 목적이었다.(영화에서 비둘기 다리에 편지를 넣어 날리는 걸 보고 크게 감동받았었다)
이런 어린 시절의 나에게 ‘눈’은 격하게 반가운 손님이었다. 지금도 눈을 보면 그 시절이 생각나 신이 나곤 한다. 군 시절 잠시 눈이 싫기도 했지만 민방위도 끝나갈 무렵인 이제는 다시 눈이 좋아졌다.
그런데 그런 눈이 올해는 별로 내리지 않았다.
삭막한 사무실에 앉아 멋대로 상상해본다. 우리들의 눈싸움을. 모두 점잖은 척 평화주의자를 가장하고 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면 피 튀기는 싸움, 아니 치열한 눈싸움이 될 거란 걸 알 수 있다. 모두의 마음속에 터트리지 못한 분노를 숨기고 살아갈 테니 오늘이야말로 스트레스 방출의 시간이다. 나 역시 쌓인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단 한 명만을 공격할 생각이다. 눈 속에 무지막지하게 단단해 보이는 짱돌을 넣고 눈으로 곱게 포장해 늘 나에게 태클을 걸어오는 최 과장에게 날릴 것이다. 안경을 벗고 나오라면 너무 대놓고 선전포고겠지? 괜한 복수로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괴로울지 모른다. 그렇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더 강력한 눈을 날려야겠다. 눈을 뚫고 짱돌이 이마에 닿으면 피가 날 것이고 붉은 피가 흰 눈을 적실 테고, 최 과장은 붉은 피가 퍼져가는 흰 눈에 고꾸라져 날 원망할 것이다.
상상이 살벌한 걸 보니 내가 요즘 뭔가 많이 억눌려 있나 보다. 눈덩이 한번 날리진 못했지만 최 과장에게 사과한다. 짱돌은 지나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