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첩 정리, 인간관계의 정리

명함을 정리하는 일은 마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과 같았다

by 윤태진

얼마 전 명함첩을 정리했다. 책상을 정리하다 쓸데없이 커다란 명함첩이 자리만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꼭 연락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휴대폰에 저장돼있을 테고 없더라도 명함첩을 뒤지는 것보다 메일함을 열어 검색으로 찾는 것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주고받은 메일이 없다면 찾는 이의 회사로 전화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작은 플라스틱 명함꽂이에 꼭 남기고 싶은 명함만 남기기로 하고 졸음 오는 오후 시간 뜬금없이 명함 정리에 열을 올렸다.


명함을 정리하는 일은 마치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과 같았다. 통쾌함이 있었다는 거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공적인 인간관계가 시작될 때부터 모아 온 명함들이었다. 명함첩 3권이 가득 찬 분량이니 약 1,000개 정도의 명함이 있었다. 명함 한 장 한 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언제 어디서 만났던 사람이었더라...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을 한 명씩 추억하는 일은 의외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 잊고 싶은 사람,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또 아무리 생각해도 대체 언제 이런 명함을 받았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명함도 있었고, 길고 긴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의 시작을 의미했던, 첫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누군가의 명함도 있었다. 그리고 명함 속 몇 명과는 사랑 혹은 사랑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으니 마치 꿈과 같은 옛이야기다. ‘조금은’ 찬란했던 옛 시절이여...


기억에 없는 명함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주저되었다. 혹시 언젠가 연락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었다. 명함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으면서 막상 버리려고 하니 ‘혹시나’라는 생각에 주저하게 되었다. 그래도 과감히 버리기 시작하니 곧 버리는 게 익숙해졌다. 그러자 점점 더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심지어는 연락을 할 것 같은 사람들의 명함 역시 고민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복잡한 인간관계가 단순해지는 것 같아 홀가분했다.


명함을 살펴보니 그동안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어떤 일을 하려 했는지 어디를 주로 돌아다녔는지. 당시는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엄청나게 중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에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던 것 같다. 자랑스럽게 명함을 건네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 코스프레를 했던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나에게 명함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이, 이걸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기뻤던 것이다.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기쁨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명함첩에는 내 명함도 있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직장의 명함에서부터 지난 회사들의 로고가 박힌 명함까지 총 다섯 개. 다섯 개의 명함 중 하나는 대학교 2학년 때 만든 명함이었다. 당시 한 수업의 교수가 각자 자신의 명함을 만들어 오라는 과제를 내줬었다. 나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짧은 문구가 들어간 명함을 만들어오라는 과제였는데, 당시의 나를 돌이켜보라는 취지를 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명함에 들어갈 문구를 신중히 작성했고 포토샵을 이용해 직접 디자인까지 해가며 명함을 만들었다. 기억 속의 명함은 제법 잘 만들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집어 든 명함에는 '열정', '꿈' 따위의 낯 뜨거운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얼굴이 벌게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부끄러웠다. 누가 볼까 무서웠다. ‘열정’과 ‘꿈’이라니...

철없던 시절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명함첩을 정리하고 약 백여 장 정도의 명함이 남았다. 남은 명함들은 새로 산 명함꽂이에 ㄱ,ㄴ,ㄷ 순서대로 정리해 넣었다. 막상 넣고 보니 명함꽂이가 다시 가득 찼다. 비운다고 비웠는데도 말이다.

정리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많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