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차려입어봐야 회사원

내키는 대로 입을 수 있으면 '갑', 없으면 '을'

by 윤태진

2009년 출판단지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 그 끝자락 옆으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장벽으로 둘러싸인 채 먼지를 풀풀 거리며 뭔가 엄청난 걸 만들고 있었다. 사실 뭐가 만들어지는지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그저 삭막한 이곳을 더욱 삭막하게 만드는 공사 현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러, 파주를 잠시 떠나 1년간의 서울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니 그 공사현장에 아울렛이 들어서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와 세련미를 과시하는 아울렛의 모습은 출판단지와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긴 소소하게 책을 만들고 그리 큰돈을 벌지 못하는 이들이 사는 동네인데, 이런 거대 상업 시설이 들어서다니 여기도 이제 뜨려는 것일까? 그나저나 출판단지에 아울렛이라니?

그런데 아울렛은 식당이 턱없이 부족한 출판단지에 한줄기 빛과 같은 녀석이었다. 물론 거대한 덩치에 비해 식당이 많지 않은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마저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더구나 아울렛은 서울 느낌(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아울렛이 생겼다고 자주 가지는 않는다. 사실 원해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아내가 가자고 할 때만 간다.


“그냥 아무거나 사 오면 안 될까?”

“좋은 말로 할 때 따라오고. 입어 보라고 할 때 순순히 입어.”


한 때는 정장을 입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정장을 입을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식 때 잠깐 감질나게 입은 것 말고는 좀처럼 입을 일이 없었다. 당시는 어린 나이였기에 결혼식에 갈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장례식이 생기길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힘겹게 들어간 회사는 기동력을 중시하는 곳이라 정장은 불필요했다. 이후 옮기는 회사들 역시 정장을 권장하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와 TV 속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직장인은 정장을 입고 나오는데 난 왜 그 흔한 정장 한 벌 입기가 이토록 힘든 것인지. 그렇다고 정장 한번 입자고 회사를 옮길 수도 없으니까. 이직의 이유가 뭐냐고 묻는 면접관에게 정장을 입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다시 보니 회식을 앞 둔 직장인들 같기도 하다. "오늘 다 같이 먹고 죽는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조폭들은 주로 정장을 입고 나온다. 싸움질하고 사람들 겁주러 다니는데 정장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언제나 멋들어진 검은 정장을 입고 다녔다. 현실에선 종종 꽃무늬 옷으로 화려함을 뽐내는 조폭도 있긴 하다. 마치 공작새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기라도 하듯. 동물적 단순함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물론 내 취향은 꽃무늬 옷보다는 검정 정장이다. 몸에 딱 들어맞는 검은 정장에 검은 구두를 신고 따각따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야 폼이 난다. 그렇게 정장을 입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허세를 뿜어내는 수컷의 위세가 철없을 때는 멋져 보이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돈도 많아 보였다. 어릴 적 당구장에서 보았던 동네 깡패 아저씨는 늘 지갑을 당구대 가장자리에 올려놨었는데 그의 지갑에는 언제나 현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덕분에 지갑은 뚜껑을 덮지 못한 조개처럼 덩그러니 배를 벌린 모습이었다. 온몸에 문신을 두른, 싸움을 엄청 잘할 것처럼 보이는 깡패 아저씨의 뚱뚱한 지갑이 그때는 그렇게나 멋져 보였다. 그때는 말이다.

어쨌든 그 멋져 보이는 깡패가 되지 않았던 것은 영화가 보여준 공통된 엔딩 때문이었다. 물론 깡패가 될 용기도 실력(?)도 없었지만. 영화 속 조폭들은 다행히도 언제나, 영화의 말미에 서로의 배신과 자멸로 대부분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과는 무관하게 뇌리에 박힌 그들의 '슈트발'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가 들며 나의 핸섬한 슈트발(내 생각일 뿐이다)을 뽐낼 기회는 점점 더 사라졌다. 이제는 슈트보다는 청바지가 더 편해져 버렸고, 편한 게 제일 좋은 아저씨가 되었다. 심지어 정장을 입을 기회가 생겨도 입지 않는다. 정장은 불편하다. 정장과 함께 신을 구두는 더 불편하다. 발에 땀나게 돌아다녀야 하니 운동화에 청바지가 제일 편하다.

또 이제는 안다. 정장을 입는 사람들은 회사의 작은 일꾼, '을'이라는 것을. 대신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걸쳐 입고 편하게 회사를 오는 이들이 사실은 '갑'이었던 것이다.

다른 것도 안다. 나의 슈트발은 영화나 잡지 속 멋진 모델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마치 휴가 나가기 전 군인들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자기 혼자 신경 쓰며 군복을 다리고 구두에 광을 내는 것과 비슷하다. 기껏 차려 입어 봐야 난 그냥 회사원이다. 그래서 이제는 청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 사장도 ‘갑’도 아니지만 그냥 맘대로 입는다. 그리고 옷장에는 여름 정장 한 벌과 겨울 정장 한 벌이 가만히 걸려있다.

출동할 날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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