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를 욕해봤자 나 역시 조직의 일원일 뿐

죽으려면 산다

by 윤태진

J는 몇 년간 힘겹게 모은 돈을 주식에 투자했다. 사실 J는 주식으로는 절대 돈을 벌 수 없다는 말을, 다른 건 다해도 주식만큼은 하지 말라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었다. J역시 주식에는 별로 관심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악착같이 번 돈이 제법 목돈이 되고 나니 재테크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부동산, 금, 펀드, 창업 등 남들이 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 봤지만 끌리는 게 없었다. 그러다 그토록 외면하던 주식에 슬며시 발을 들이게 된다. 아무리 찾아봐도 주식만큼 쉽고 간편한 재테크가 없어 보였다. 더구나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용돈 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이 어려웠지 막상 시작하고 나니 어딘가에 홀린 듯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2억만 투자하겠다는 당초 계획은 8천만 원을 더 대출받으며 2억 8천만 원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20여 년 악착같이 벌어 모은 돈이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허공을 날아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돈이 날아다니기 시작하니 돈에 대한 현실감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6개월 후 주식은 2억이 날아간 8천만 원이 되었다. 어떻게든 이 악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J는 조급한 마음에 부동산으로 눈을 돌렸다. J는 다시 대출을 받아 1억짜리 원짜리 오피스텔을 구입했다. 마침 부동산 투자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시세차익을 거두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J는 흔한 드라마 속 주인공의 철없는 삼촌이 집안을 말아먹듯 흔한 수순으로 그동안의 노력을 말아먹기 시작했다. 주식은 실낱같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회생불능이 되었고, 오피스텔은 월세는커녕 전세로도 나가지 않아 공실이 된 지 5개월째다. 월세를 받아 대출 이자를 갚아나가겠다는 종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던 일련의 사태를 아내에게 고백한 J는 간신히 이혼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힘겹게 얻은 둘째를 유산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집주인은 전세 값을 3천만 원 올려 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가는 J를 바라보며 A는 사람의 인생이 이토록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솔직히 J가 휴대폰도 꺼둔 채 홍보를 하러 다닌 다는 게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다. 외근을 나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이번 신간이 팔리지 않는 것도 왠지 J가 성실히 영업하지 않아서인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그의 사정이 딱하지만 힘겹게 편집한 책을 성실히 팔아 내지 못한다면 사정 따위 알게 뭐냐 라고 A는 생각했다.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다고. 괜한 피해 주지 말고 그만둬 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A가 이번에 준비한 책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실적 압박은 점점 더 심해졌고, J가 나가지 않으면 당장 자신이 나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J가 화장실에서 남몰래 흐느끼는 소릴 듣고 나니 이번 책은 아무래도 틀려먹은 것 같았다.

휴대전화가 꺼진 탓에 회사로 자꾸만 전화를 하는 J의 아내에게 부부싸움은 휴대전화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돌려받지는 않았다. 전화벨은 한참을 울리다 체념하듯 끊겼다.


대체 누구의 잘못이었을까? 허황된 꿈을 찾아 주식을 시작한 J가 모든 죄를 떠안아야 하는 걸까?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현실을 지옥과 비교하지만 실제 우리가 사는 곳은 지옥이다.

힘겹게 사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며 나의 삶을 감사하고 안도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지만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임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고 안주하게 된다.


"회사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았으니 월급을 줄게요."

"네 고맙습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회사 말 잘 들어야 해요."

"그럼요. 회사에 꼭 붙어 충성하겠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고 만족하자는 이런 생각이 일종의 패배의식으로 시작해 보수주의, 노예 의식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지 걱정될 때가 있지만 반드시 거친 저항과 싸움, 희생과 소란스러움만이 변화와 혁신의 동력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과장되게 움직이지 않아도, 소란스럽게 목소리가 크지 않아도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결국 진심은 통하고 만다는 것을.


월급날이 되어 다시금 통장이 두터워지면(타인의 기준으론 별로 두텁지 않을 수 있다) 다시금 고마움을 느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회사나 들어가라는 어른들의 말이 멋지진 않지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월급쟁이는 자영업자들에 비해 여유로운 편이다. 조직의 일원으로 살고 있으니 기댈 언덕이 있다. 허구한 날 회사를 욕하고 상사를 욕해봤자 나 역시 조직의 일원일 뿐이다. 더구나 날 먹이고 살리는 조직이다. 이쯤 되면 내가 사라지고 명함 속의 내가 나를 대신해도 뭐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나뿐 아니라 모두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딱히 특별한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 것도 아니지만 어느새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순응하게 된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死卽生)이란 말이 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란 얘기다. 마치 수년간 절치부심 연습해 찾아간 오디션에서 친구는 떨어지고 별생각 없이 쫓아간 자신은 합격해 배우가 된다는 흔한 스타의 성공담과 비슷하다.

몸에 힘을 빼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다만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는 강인한 자존감은 꼭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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