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스웨덴의 수잔 브링크들과 그들의 공깃돌
*스톡홀름 한인입양인협회(AKF) 신임 임원단 초청 주스웨덴한국대사관저 만찬(2022.4월)
한때 우리나라에서 입양은 당연히 '해외'입양을 의미했고, 그것은 가난과 어려운 살림에 처한 부모가 자식을 위한 결단처럼 비추어질 때가 있었다. 1983년 온 국민을 울렸던 TV드라마 '간난이'의 후반부에는 주인공 간난이가 미국으로 해외입양을 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동생 영구를 먼발치에서 눈물지으며 보면서, 그래도 그것이 동생이 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 '가슴 아픈 결심'으로 묘사된다.
이렇게 해외 입양된 이들은 몇십 년이 흘러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하여 번듯한 모습으로 한국에 돌아와 유창한 영어발음을 구사하며 좋은 양부모 밑에서 잘 컸지만 고국을 그리워했으며 자신을 입양시킨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었다.
1996년에는 미국에 입양되어 공군사관학교 생도가 되었지만 백혈병에 걸린 '성덕 바우만'이란 청년을 살리기 위한 범국민적인 골수 기증 운동이 벌어져 극적으로 기증자를 찾아내는 일도 있었고,
2014년에는 한국계 입양아 출신인 플뢰르 펠르랭이 프랑스에서 통상관광 국무장관에 임명되었다며, 그녀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는 뉴스가 전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 버려진 입양아들이 선진국에 가서 사랑이 넘치는 좋은 양부모 밑에 자라다 보니 역시 잘 자랐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다 보니 한국을 잊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들을 했었다. 간혹 그들이 한국에 돌아와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를 찾기라도 하면 '감격의 재회'라며 묘사되곤 했다.
나중에는 예능의 한 장르로도 발전해 한국에 사는 친어머니가 몇십 년이 흘러 자식이 입양된 나라로 가서 어느 공원에 앉아 입양된 자식을 기다리면 그 소식을 방송국을 통해 미리 전달받은 아들이나 딸이 어머니를 만나러 나올 것인가 하는 것도 있었다. 초초하게 기다리던 어머니는 입양된 친 아들이나 딸이 나오면 부둥켜안고 울고, 그 자식들도 울으면서 '나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며 훈훈하게 끝나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러나 간혹 제작진이나 시청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입양된 아들이 친 어머니를 만날 생각이 없다 하여 쓸쓸하게 돌아오는 일도 있었고, 간혹 그를 넘어 자신을 입양시킨 부모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해당 프로그램에 나온 연예인들은 입양아들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간혹 가다 나오는 이런 케이스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어 저런 경우도 있네라며 생각했다. 흔치 않은 경우들이었으니까.
입양은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선진국에서의 삶을 이어주는 '아이를 위한 결정'이었고, 그 아이들이 잘 자라 연어가 고향을 찾듯이 정체성을 찾아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스토리는 일종의 우리가 입양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이를 깨부수는 충격적인 영화가 1991년 발표됐으니, 바로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 여성의 슬픈 이야기를 그린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이었다. 영화는 평점 9.49를 기록하며 외화가 판을 치던 시대에 관객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이 영화는 '나를 낳고도 입양을 시킨 친어머니를 증오하며 자신이 복수하기 위해 오래 살기를 바랄 정도로 증오한다'라고 하면서, '결혼해서 부자로 살고 있다면 가정을 파괴할 것이고 가난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얼굴에 침을 뱉겠다'라고 말하는 분노에 찬 충격적인 멘트로 시작하는 실제 입양아들의 인터뷰로 시작되며, 이어서 최진실이 연기한 수잔 브링크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보고 싶고, 만나게 되면 왜 이토록 먼 곳으로 날 보내야 했는지 만나면 묻고 싶다'며 피아노로 아리랑을 슬프게 연주한다.
영화는 1963년 한국에서 태어나 '신유숙'이라는 이름으로 5남매의 막내로 살다가, 1966년 스웨덴에 입양된 후 수잔 브링크(Susan Brink, 1963~2009)로 살았던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4살이 되던 1966년 가을, 입양되어 낯선 나라 스웨덴의 항구 도시 노르쉐핑에 도착한 유숙은 '수잔 브링크'라는 새 이름이 지어지고 살갑게 대하던 양부모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낯선 환경과 생소한 모습의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의 소외감, 친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 속에 살아가던 그녀는 사춘기 이후 180도 달라진 양모와의 마찰을 견디지 못해 14세에 첫 자살 시도를 하고, 결국 18세에 집을 나와 학교 기숙사에서 한국의 친모를 찾았으나 모두 실패한다.
이후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 친구의 배신으로 인한 실연 등으로 다시 두 번째 자살 시도를 하지만 미수에 그치고,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그녀는 종교의 힘에 의해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이후 종교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그녀는 아이도 키우고 공부도 하는 힘겨운 생활을 강한 의지로 이겨내고 24살에 스웨덴의 명문 웁살라 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던 대학 3학년 때인 89년, 한국의 한 방송국에서 기획한 해외 입양아 특집 프로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23년 만에 친모를 찾게 된다. 이후 해피엔딩이었을까?
15년 후 그 방송사가 41살이 된 그녀를 다시 찾았을 때, 그녀는 웁살라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한다고 밝히면서, 가족과의 경제적 문제에 얽힌 문화적 차이로 친어머니와는 절연했으며 '더 이상 한국을 그리워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후 수잔은 2003년 발표한 ’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지 마세요’라는 기고문을 통해 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들은 남자든 여자든 우선 외모 때문에 매일 일상적인 고통을 겪고 있으며 스웨덴에 입양된 사람들의 실업률은 50%이고 자살률은 스웨덴 평균의 5배가 넘는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이 이제는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예쁘고 재능 있는 아들, 딸들을 외국으로 보낼 아무런 경제적 이유가 없다”며 “평생 고통스러운 이방인으로 살게 하고 국가적으로는 큰 손실을 안겨주는 국외입양을 중단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입법청원과 언론 기고 등 평생 입양인들의 권리를 위해 노력했던 수잔은 2009년 암으로 46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노르쉐핑에 묻혔다. 그녀가 떠난 지 벌써 16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은 해외입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말 슬픈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야."
"우리도 어렸을 때 다른 지방으로 가는 것은 물론 같은 지역 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도 적응하는 것이 힘든데, 지금처럼 인터넷과 같은 정보도 없는 시절에 이제 막 한글을 말하기 시작한 어린이들이 이국땅에 내던져져서 겪었을 그 시련은, 직접 그들을 만나보진 않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 같아."
"그래서 오늘 스웨덴 내 한국 출신 입양인들을 직접 만나본 외교관을 초청했어. 이분은 2019~2022년 스웨덴에서 경제 참사관으로 근무를 하셨다는데, 근무하는 동안 몇 번 입양인들과 직접 만났다는군."
"정말 잘 생기셨군요!!! 영화배우인 줄 알았어요."
"뭘요...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겹군요."
".....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스웨덴에 정말 한국 출신 입양인들이 많나요?"
"2021년 주스웨덴한국대사관에서 발간한 책에 보면 2020.12월 기준 스웨덴에 거주하는 재외국민과 재외동포는 13,055명인데 이 중 시민권자인 입양인은 8,937명으로 68.4%를 차지하고 있어요. 상당히 높은 비중이죠. 유럽에서는 프랑스에 이어 스웨덴이 한인 입양인 수 2위를 기록하고 있고, 스톡홀름과 예테보리에는 입양한인협회(AKF)가 운영되고 있어요."
"실제로 입양인들을 많이 볼 수 있나요?"
"인구 천만명의 스웨덴에서 그들의 존재는 아주 작지만, 업무 중 종종 만난 적이 있어요. 사회적으로도 유명 인사들도 종종 있는데, 스웨덴 의회 4선 의원으로 EU의회 의원까지도 지낸 '예시카 폴피예르(Jessica Polfjärd)' 뿐만 아니라 몇몇 경제계 인사들이 활약하고 있어요. 다만, 그들이 입양인이라고 드러내기보다는, 보통 스웨덴인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에게 직접 표현은 한 적은 없지만, 스웨덴 언론에서 입양인들이 한국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원망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꼭 긍정적인 것만은 같지 않아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지요."
"구체적으로 그런 사례를 들은 적이 없어서... 입양인들의 이러한 시각에 대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을까요?"
"음... 해외입양 및 학제 간 한국입양연구 관련 저명인사로 토비아스 휘비네트(한국이름 이삼돌) 박사라는 분이 있는데요,
참고로 그는 돌도 지나지 않은 나이로 1972년 3월 스웨덴으로 입양되어 자란 뒤, 웁살라대학을 졸업하고 스톡홀름대학에서 '해외 입양과 한국 민족주의-한국 대중문화에 나타난 해외 입양과 입양 한국인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은 분입니다. 그는 우리 정부가 주관했던 '세계 한민족 축전'에 참가하며 느꼈던 경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백 명의 재외 한국인이 참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위스, 미국 등에서 온 20명 정도의 입양인도 있었다. 사실 그것은 잔치라기보다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한 속성 과정에 가까웠다.
취재기자들은 축전 기간 내내 나를 포함한 입양인들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입양인들의 드라마틱한 개인사를 거듭거듭 캐묻고, 한국 부모와의 눈물겨운 재회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우리에게 한복을 차려 입히기도 하고, 젓가락을 사용해 한국 음식을 먹도록 부탁하거나, 한국의 전통 승무를 배우는 장면을 억지로 연출시켜 사진들을 찍어댔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적인 질문들로 인해 불쾌하기가 그지없었던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주최 측이 우리가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는지, 기자들이 우리에게 듣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입양 국가와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피상적인 차원에서만 서양인일 뿐 본질적으로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도 아닌 바로 한국인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우리는 마침내 모국의 집으로 돌아온 존재였으며, 갑자기 한국 문화에 대해 눈이 뜨이기 시작했고, 오매불망 그리워한 것처럼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또한 항상 한국의 친척들을,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엄마’를 찾아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입양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이렇게 비판하면서, '염치도 없이' 해외 입양인에 대해 재한국인화를 도모하는 한국 민족주의의 단면이라고 했죠."
"오...." "아..." "할 말이 없네요..."
"혹시, 직접 만나 기억에 남는 일도 있었나요?"
"2022.4월 예테보리 출장 시 지역 한인입양인협회(AKF) 사람들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 남아 선호 사상이 심해서 그랬는지 참석자 분들은 다 여자분들이었지요. 서너 살 때 입양온 분들도 있었지만 아예 갓난아기 때 입양온 분들도 있었어요.
다행히 좋은 양부모를 만나 교수가 되신 분도 있고 각자 생활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었는데, 나이들이 중년이다 보니 한국에 대해서는 여느 외국인들처럼 호기심이 있어 '한 번 가보고 싶다' 정도였지 한국이 너무 그립거나 부모를 너무 찾고 싶다고 말하는 분들은 없었어요.
간단한 한국어도 아예 모르는 분들도 있었고... 제가 만나기 전 상상했던 것과 달라 좀 당황스러웠죠. 저도 편견에 빠져있었다 할까요.
시간이 지나갈수록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분명 외모는 한국인들인데, 말과 생각은 한국인인 아닌 사람들... 그런 생소한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만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할 뿐, 그저 평범한 스웨덴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헤어질 때, 소박한 검정 종이상자에 "SWEDEN KOREA TOGETHER"라고 적힌 선물이라고 주셨는데 역시 스웨덴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아, 저도 스웨덴 사람들과 헤어질 때 그런 종류의 선물을 받은 적 있어요. 그 자리가 좋았나 봐요. 근데 무슨 선물을 받으셨나요? 스웨덴이니까 역시 '달라호스' 같은..."
"아니에요. 숙소로 돌아와 자기 전에 열어보았는데, 너무 놀라운 선물이 들어있었죠."
"뭔데요....?"
"아주 옛날 우리가 없던 시절 여자애들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었습니다.
스웨덴 전체에 한국 슈퍼가 스톡홀름에 구멍가게 만한 것 하나 있는 정도인데... 더군다나 거긴 예테보리였거든요. 이걸 어떻게 구했지라는 생각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미안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대한민국의 가장 큰 피해자일 수도 있는데,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품어주었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정말 입양인들이 평생을 걸쳐 살아온 그 복잡한 감정을 우리가 단순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매년 몇 천 건이던 해외입양은 2010년대부터 국내 입양보다 적어지고 그 숫자도 이제는 100건 이하로 내려왔지만, 이미 전 세계에 퍼져 뿌리를 내린 입양인들은 어찌 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대하느냐에 따라 같은 피를 나눈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철천지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이제는 60을 바라보거나 넘었을 그 입양인들.
그들에게 한국은 공깃돌 같은 그리움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