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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전쟁 in 스웨덴

22-3. 스톡홀름-거리에 휘날린 '감사합니다'의 의미

by Tangpi

* 한국전쟁 발발 당시 부산에 있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모습


Team Kungsleden(TK) 팀은 2020.5월 스톡홀름의 주요 번화가에 걸렸던 '감사합니다' 표지를 보였다.


"저게 뭐야?"


"스웨덴이 한국전쟁 당시 의료지원단을 보낸 지 70주년이 되어 감사의 의미로 스톡홀름 주요 거리에 붙었던 광고판이에요. 당시 스웨덴 사람들 중에 그 의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연혁을 알고 한국인들은 '받은 사랑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며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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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봐야 뭐 전투병력을 보낸 나라 만한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스웨덴은 한국 전쟁 당시 가장 먼저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여 야전병원을 세웠고, 전쟁이 끝나고도 우리나라 의료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나라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BUdZQdEu6E


지난 발표에서 현재 한국의 의대 목적 입시 열풍에 대해 지적한 바 있는데요,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된다는 건 부와 지위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이러한 의술을 부와 지위보다 더 가치 있게 활용한 사례를 스웨덴에서 찾아볼 수 있고, 그 대상이 한국이어서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떤 나라에 접근할 때 역사적으로 특별했던 공통 이슈가 있었다면 더욱 그 나라와 가까워질 수 있는 지름길이 되겠죠. 더군다나 그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튀르키예가 그렇고, '피로써 맺어진 혈맹'이라는 미국이 그렇죠. 스웨덴도 그렇습니다. 스웨덴의 한국전쟁 당시 의료지원단 파견은 두 나라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고리 중 하나입니다."


박 사장이 말했다.

"그래, 의료지원단은 어디서 들어보긴 한 거 같은데, 가끔 한국 전쟁이나 남북한 관련 뉴스가 나오면 스웨덴이 나오길래 저 나라가 왜 나오지? 했었어."


"스웨덴은 지금도 한반도에 가장 많은 곳에 인력을 파견한 나라이기도해요. 서울, 평양, 그리고 판문점에요. 강한 중립주의 전통을 가진 스웨덴은 대외적으로는 남북한 등거리 외교정책 표방하면서 우리나라와는 1959년, 북한과는 1973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남북한 모두 상주공관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판문점에 설치된 6.25 전쟁 이후 정전 협정 준수사항을 감시 및 감독하는 상설군사기구인 '중립국감독위원회(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를 구성했던 4개국 중에 하나가 스웨덴이에요. 설치 당시 스위스와 스웨덴은 유엔군사령부에서 선택하였고, 당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에서 선택했지요. 지금은 북한 측 두 나라가 철수해서 사실상 스위스와 스웨덴 측에서 파견된 군인들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어요. 2013년 그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담은 일상을 소개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죠."

https://youtu.be/e3-OikKvCBc?si=xiU3MAXC1Cs5X1TN

NNSC 관련 다큐멘터리. 중반 이후 스웨덴 군인들의 일상이 나온다.


"북한이 그래도 스웨덴은 신뢰하나 봐?"


"일단 스웨덴은 서방국가로서는 최초로 북한과 수교한 국가예요. 평양에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외국 공관 중 하나인 주북한 스웨덴대사관은 북한 내 미국, 캐나다, 호주의 '이익대표부(protective power)'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어요. 또한, 미국, 호주, 캐나다, 노르딕 국가의 영사업무를 대행하며,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대신하여 쉥겐지역 입국 비자 신청도 접수하고 있지요.


스웨덴은 한반도 평화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일례로 2019.10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미 실무협상이 비밀리에 개최된 곳이 스톡홀름이었어요. 이는 북한이 신뢰하는 몇 안 되는 국가이기 때문이죠. 실제 스웨덴 외교부에는 고위직 외교관이 '대북특사' 업무를 상시 수행하고 있습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1005044851098


한편으로는 한국 전쟁 당시 적군임에도 자신들을 정성껏 치료해 주었던 '스웨덴병원'에 대한 기억이 정전 이후 북으로 돌아간 이들로부터 퍼져나가 우호적인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의외로 우리나라 문제에 스웨덴이 많이 관련되어 있구먼."

"중립국이랍시고 외교나 전쟁에서 폼 잡는 그런 것만 하는 거 아닌가?"


"앞에 소개했던 뉴스에 나왔듯이 한국 전쟁에 가장 먼저 의료지원단을 보내주었고 그들이 이 땅에서 어떤 기여를 했는지 지금부터 들어보시면 좀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6.25.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고 군사행동의 중지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전투행위가 지속되자 이틀 후 다시 소집되어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원조' 결의안을 채택하고 다시 6.29. 남한에 대한 평화유지군 지원을 회원국에 요청한다.


당시 소련은 이 군사적 원조 결의안이 유엔 헌장 제27조를 위반했다며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2개월 후 유엔은 이 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하는데 스웨덴 외교부는 소련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며 대한민국의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를 취할 유엔 총회의 권한 강화를 제안하는 미국의 연설에 우호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동시에 스웨덴 정부는 군대 파병은 불가하나 다른 형태의 지원을 고려하겠다고 하고, 1950.7.14. 의료지원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참고로 당시 국왕이었던 구스타브 6세는 1926년 왕세자 시절 한국 경주의 '서봉총'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고 한국인 고고학의 선구자 최남주 선생 가문과 교류를 이어왔는데, 의료지원단의 신속한 파견과 이후 많은 물자와 기금 지원의 숨은 조력자였다고 한다. 그는 현 국왕 구스타브 16세의 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은 스웨덴의 한자표현인 '서전(瑞典)'의 '서' 자와 봉황의 '봉' 자를 합쳐 지은 것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을 방문한 스웨덴의 왕자가 봉황 장식의 금관을 발굴하여 이렇게 붙였다. 원래 '서전총'으로 명명하려다 구스타프 6세의 반대로 '서봉총'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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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 왼쪽 하단 무릎 구부린 사람이 구스타프 6세.


한편,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 적십자의 주도로 야전병원 파견을 준비하여 병원장으로 그루트 대령을 선출했고, 그는 1950.9.14. 선발대로 부산에 도착하여 미군 제2군수사령부와 협의를 통해 당시 부산상고 자리에 병원을 설치하기로 합의를 한다. 이후 의사 10명, 약사 2명, 간호사 30명 및 행정요원으로 구성된 176명의 파견단은 8.27. 미국에 도착하고 한 달 정도 이후인 9.23. 부산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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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모습과 한 잡지에 소개된 스웨덴 간호사(1950.9월)


연 인원 총 1,124명의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의 의료진은 교대로 근무하면서 최대 450개의 병상에서 25,000명의 UN군 및 포로를 치료했고, 점차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민간인들에게까지 손길을 뻗으면서 수많은 휴머니즘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병원터 및 고아들.jpg 스웨덴 야전병원 모습과 한국 고아들을 돌보는 스웨덴 의료진들


대표적인 것이 한국전쟁 당시 스웨덴병원과 의료진의 활약을 다룬 다큐멘터리 `한국전과 스웨덴사람들(The Swedes in the Korean War)'의 마지막에 나오는 '목발소년 사보'에 대한 이야기인데, 1953년 당시 4살이던 박만수(69) 씨는 부산 우암동에서 트럭에 치어 스웨덴 병원에 긴급 후송돼 5번의 대수술 끝에 왼쪽 다리를 절단한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의료진은 나무 의족을 만들어 주고 이름을 '사보'라고 불렀다. 목발을 짚고 하루가 다르게 회복하는 소년의 모습은 전쟁의 포화에서 최선을 다했던 의료진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60여 년이 흘러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70이 다 된 그를 경남 밀양에서 찾았고, 그는 목발을 짚은 소년이 자신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을 치료하고 나무 의족까지 깎아 만들어준 간호사 '앨리스 올센슨'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고, 생명의 은인인 스웨덴 의료진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20190923_목발.jpg 4세와 69세의 박민수 씨 모습


한편, 야전병원단 소속으로 6개월간 부산에서 근무했던 셔스틴 요나손(Kerstin Jonasson) 여사는 88세인 2011.6월 스웨덴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왕립공학대학교(KTH)에 전 재산인 7천만 크로나(한화 118억 원)를 기부하며 그중 일부를 한국 대학과의 협력에 사용토록 요청했다.

셔스틴 요나손 여사

KTH 역사상 단일 기부액으로는 최고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KTH는 그 뜻을 기려 KAIST와 협정을 체결하고 한국과 학생 교류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휴전 이후 스웨덴 야전병원은 부산 스웨덴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54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민간인 진료에 주력하여 1957년 철수할 때까지 2백만 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봤다.


당시 스웨덴병원은 부산 사람들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였는데, "16세 때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다 스웨덴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살아났다"는 조군자 씨는 이후의 삶은 스웨덴 사람들이 준 선물이라고 하며 60대 후반이던 2000년대 그 금발의 군의관을 찾아 스웨덴을 방문했기도 했고, 세 살 때 앓은 충수염으로 3년간 입원한 류재영 씨는 "충수염은 그때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며 "의료진 중 나를 많이 안아준 파란 눈의 '에바' 선생님을 꼭 한번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이 병원에는 한국인 의료진이 함께 근무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의료 기술 전수와 훈련이 이루어졌고, 전쟁으로 북적였던 주변 고아원에도 방문하며 당시 절실했던 결핵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시행했다. 이들의 활동에는 스웨덴 정부의 재정 지원이 계속 이어졌기에 가능하였으며, 스웨덴 적십자는 한국으로의 구호 물품과 기금 모금과 한국에 대한 이해 증진을 위해 한국 어린이들의 일상생활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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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쟁 당시부터 한국 내 의료원 건립을 목적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 의료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3개국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한국전쟁 정전 이후 의료지원단 본대는 철수하였으나 민간인 의료진은 한국에 잔류하면서 지원을 지속하던 중,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이 한국 정부와 중앙의료원 건립 계획에 합의하며 각각 연간 150만 달러의 연간 운영비를 분담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1958.11월 현재 국립중앙의료원이 개원하게 되었다.

1950년대 스칸디나비아 병원 의료진


스칸디나비아병원으로 알려진 국립중앙의료원은 한국 의료서비스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는데, 1959년 이 병원 산하기관에 간호학교가 설립되었고 한국-스칸디나비아 재단의 지원으로 수년간 웁살라 대학병원 등 스웨덴 유수의 의료기관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선진 의료기술이 한국 의사들에게 전수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이미 1911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고 명문 카롤린스카의대를 보유한 세계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상당수의 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의료진들이 한국에 상주했는데 1959.6월 당시 기록에 따르면 국립중앙의료원 내에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파견된 의료진 89명, 스칸디나비아 이사회에 의해 채용된 한국인 직원 119명 등 총 738명이 근무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68년 그 운영권은 한국정부로 이양되었으며, 현재까지 우리나라 공중의료체계의 산실이 되고 있다. 참고로 박태진 작가도 1973년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0^

국립중앙의료원 스칸디나비아기념관

재밌는 것은 우리나라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3국과 외교관계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 국립중앙의료원 설립과정에서 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우리나라와 모두 같은 날짜인 1959.3.11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데, 이는 3개국이 우리나라의 ‘국립중앙의료원’ 설립에 함께 참여하여 우리 정부가 동 3개국과 의료원 설립 협정을 동시에 체결(1956.3)하면서 이후 수교 협의도 함께 진행한데 기인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스칸디나비아 3국과 외교 관계가 없어 도쿄에 주재하는 이들 나라의 대사들이 이 협정식에 참여했는데, 이때부터 이들 국가들과의 본격적인 관계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외교관계 수립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허... 스웨덴이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미친 영향이 많았네..."

"왜 지금까지 몰랐었지?"


"드러나지 않게 선을 이행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성향이랄까... 하여간 70여 년 전 당시 세계 최빈국에 그것도 전쟁이 난 상황에서 가장 먼저 의료진을 보내주고 군인을 넘어 민간인, 고아들까지 품어주었던 그들의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네."


"그렇다고 스웨덴 사람들이 우리가 이렇게 해줬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사람들도 아니잖아요. 아예 우리는 그걸 잘 알지도 못했으니... 당시 파견됐던 이들과 가족들은 매년 9.23. '스웨덴 한국전쟁 참전기념일'로 하여 주스웨덴한국대사관과 기념행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 그 날 만큼은 스웨덴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과 감사한 마음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나아간다면 현재 우수한 인재들이 집중되고 있는 의대 진학 학생들에게 스웨덴의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숭고한 정신을 바탕으로한 의술이 외교에도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알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20190923_182800.jpg '스웨덴 한국전쟁 참전기념일' 행사에서 의료지원단 가족. 그녀의 휴대폰 배경화면은 태극였다.(2019.9.23, 스톡홀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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