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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Oct 19. 2021

마누라 속이기 season3-2

Sami족이 12,000년을 살아온 이유 - '단순과 순응' 이란 진리


비행기는 Lapland의 관문 Gällivare로 향하고 있었다.


Gällivare는 지난해 일주한 코스인 Inlandsbanan의 종착지로, 북극권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위쪽으로 100km 떨어져 있다(북위 67도 7분). 무슨 현자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철없는 나의 모험은 드디어 북극권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지난번 그 임박에서 우향우 하는 바람에 못 갔었던 것이 내심 아쉬웠는데, 

역시 마음이 가는 곳은 언젠가는 가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비행기는 직행버스가 시골 터미널을 들렀다 다음 행선지로 가듯 Arvidsjaur 공항을 들렀다 한 시간 반 만에 Gällivare에 도착했다. 차로 오면 쉬지 않고 달려도 13시간이 걸리는 길이다. 공항도 작아 사람도 거의 없고 렌터카는 청사 내 비치된 사물함에서 미리 받은 비밀번호로 열고 주차장에서 찾았다. 이거 완전 혼자만의 여행이라지만, 정말 화끈하게 사람 없네. 스웨덴 답다.

시골 터미널 같은 Arvidsjaur 공항 전경


공항에서 차를 몰고 숙소로 가는 길은 적막했다. 이러다가 숙소가 나오는 거냐 하고 생각할 때, 정말 작은 시내에 위치한 숙소를 발견했다. 저렴한 데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많았다.

북극권의 midnight summer가 시작되어 자정이 지나 방 안에 커튼을 쳐도 환하다.

매번 여행할 때마다 평소에 딴 걸 아껴야지 호텔은 아끼지 말자고 하면서도 늘 도착해서 후회한다. 아침도 주고 맨 위층에 공용 사우나도 있으니 내부는 포기했지만, 너무나도 단출하다 못해 침대도 삐걱거리는 방이다.


짐을 던져두고 사우나장에 갔다. 다들 midnight summer를 즐기느라 그런지, 아직 내부에는 사람이 없고 어떤 부자와 나만 있었다. 저녁 늦게 도착해 집에서 싸온 삶은 계란으로 식사를 대신했더니 속이 안 좋다. 계속 가스를 분출해(소리는 안 나지만 이런 게 독하긴 더 독하지), 그 아버지와 아들에게 미안했다. 


"Papa, I can smell something weird.(아빠 이상한 냄새가 나)"

"Come on, guy. You'd better breathe through your mouth, not nose, here.

(임마, 여기선 입으로 숨 쉬어, 코로 말고.)"

아빠는 심호흡까지 하는 모습까지 시범을 보였다. 죄책감이 들어 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내일 여정을 구상해보았다. 공항에서 가져온 지도를 펼쳐놓고 가고 싶은 곳을 찍었다. 나름 시간을 계산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는데, 길이 국도라서 거의 12시간을 운전하게 되었다. 만만치 않은데라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늘 그렇지만 고민은 자고 나면 또 해결되기도 한다. 


고민의 흔적들. 가고싶은 곳은 많은데 시간이 안될 듯했다.


그렇게 자는 둥 마는 둥하다 깼다. 조식을 마치고 차를 몰아 호텔 앞 Gällivare역부터 들렸다. 그 옛날 철광석을 나르던 이 역은 목조 건물로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 이 역을 거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 생각하며 혼자 잠시 역을 둘러보고 나왔다. 오늘 갈 길이 멀어,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다.

Gällivare의 중심인 역사 주변. 옛 모습을 간직한 목조 건물이다.


시내를 벗어나 Laponia 방향으로 간다. 숲을 뚫고 나있는 도로를 하염없이 달리다 보니 사람보다 순록이 더 많이 보인다. 가끔 영화에서나 보던 무스(moose) 사슴도 보인다. 이야, 사람 없는 데를 찾아왔는데 제대로 오긴 온 것 같군. 얼마 안 가 'Laponia porten'라는 건물을 발견했다.


Porjus라는 마을에 위치한 'Laponia 입구'라는 뜻의 이 건물은 Laponia에 대한 안내와 이 지역의 풍부한 수량을 바탕으로 한 수력발전, 그리고 Sami족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일종의 관광안내소 같은 곳이다. 다만, 아직 관광시즌이 아니어서 출입문은 닫혀있었고 12시에나 문을 연다고 붙어있다. 오늘 목적지를 둘러보고 오면 문 닫을 시간이라, 결국 못 보겠구나 싶었다.

기울어진 게 아니라, 원래 건물이 이래요.

아쉬운 마음에 건물이나 한 번 둘러볼까 하고 반대편으로 돌아가는데, 뒷문이 열려있었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보니 젊은 부부 둘이 있다.


"지금 열어요?"

(여자는 아니라고 하는데 남자가) 

"괜찮아요, 들어와요. 어디서 오셨수?"

"아, 한국에서 왔어요."


그러자 여자가 반갑게 삼성 휴대폰을 꺼내며, 자기가 한국을 참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 과자라도 들고 올 걸.


"아직 문 여는 시간은 아니지만 둘러보세요. 안내 자료들도 있구요. 10분짜리 영화도 틀어줄 수 있어요. 볼래요?"

" 아, 좋죠."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지역 수력 발전 역사에 대한 거고 하나는 Sami족에 대한 거예요."

"수력 발전에 대한 거 볼게요."

"오, 당신은 특이하네요. 수력 발전에 대한 영화를 보다니."

"전에 북쪽에 들러 Sami족에 대한 책자를 많이 구해봤어요. 좀 지겹죠. 내가 순록도 아닌데."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자그마한 시청각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그럴싸한 10평 남짓한 방에 나 혼자 들어갔다. 남자는 블루레이 판을 들고 와 틀어주고 나갔다. 내용은 나름 재밌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그는 내부에 전시된 자료들을 보여주며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사람이 반가워서 그런 걸까, 그는 참 친절했다.

전시관 내부의 laponia 지형도


"Sami족에 대한 내용이 많네요. 근데 그들을 어디 가면 볼 수 있죠?"

"내가 Sami족이에요."

"네?"

Sami족 아저씨와. 대머리여서 그렇지 나보다 어리다.

그는 대대로 이 지역에서 살아온 Sami족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신은 전형적인 스웨덴 백인도, 그렇다고 원주민인 Sami족 같지도 않은데..."

"우리 할머니가 태국 사람이요. 그래서 아시아 사람 같이 생겼다는 소리도 종종 들어요."

"아하~ 그렇군요.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친근하게 좀 느껴졌어요. 하하."


대화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그것처럼 부드럽게 술술 넘어갔다. 그는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했지만, 갈 길이 멀다고 하는 나에게 안내 책자를 더 챙겨주면서 아쉬운 작별을 했다.     

사람을 오래 그리고 자주 만난다고 그 향기가 더 많이 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짧은 만남에도 더 오래가는 여운을 남길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짧지만 향기 나는 만남을 더 많이 갖고 싶다. 



Laponia porten에서 얻은 책자의 맨 앞에는 이 지역에서 자란 Sami족 할머니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나는 여기 Stuor Julevu(Laponia 내 Stora Lulevaten 호수의 한 지역)의 호숫가에서 자랐는데,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낚시를 시작해요. 우리는 큰 배가 있어 모든 식구들이 가재도구 그리고 개들까지 태우고 움직이는데, 바람이 너무 세면 다시 물가로 돌아와 기다리곤 했죠.


(점점 얼음이 녹아) 서쪽까지 갈 수 있어 산속 세상이 열리면, 아빠는 yoik(Sami족의 전통음악)을 불렀죠. 그때 말고 노래하신 적이 없었어요. Stuor Muorkke(Laponia의 북서쪽)는 우리 모두가 만나는 장소였어요. 같이 놀고 인사하며 지냈죠. 그땐 라디오도 없었지만 여러 소식들을 거기서 들었어요.


한 곳에서 낚시가 끝나면 다음 장소로 옮겨 다녔는데, 우리는 호수의 어디에 물고기가 있는지 알았어요. 모두 자기들만의 낚시 포인트들을 가지고 있었구요...."


Sami족 할머니의 인터뷰 내용. 밑줄 쳐가면서 봤다.

유럽의 변방인 스웨덴은 전반적으로 척박한 땅이다. 스웨덴에서도 오지인 북쪽에서부터 러시아의 최북단이라고 할 수 있는 콜라반도까지, Sami족은 빙하시대가 끝나갈 무렵인 12,000년 전부터 살아왔다.


이런 자연환경 속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얼음이 녹으면 낚시를 시작하고, 바람이 세면 기다리고, 그렇게 열린 산속 내 세상을 만나며, 호수의 물고기를 따라 낚시를 하는, 단순하지만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그런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얼음을 깨부수고, 바람을 거스르거나 호수의 물고기를 몰아가듯 세상을 거스르며 살았다면, 자연은 그들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세상을 거스르며 살면서도,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드냐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며, 순리대로 살지도 않고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넘을 수 없는 장막을 쳐가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는지. 


나도 옛날엔 '사랑하기에'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촉촉한 감성을 가지고 순리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는데. Sami족의 '단순과 순응'이라는 자연을 닮은 삶을 생각하며, 차의 시동을 다시 껐다. 힐링과 반추, 반성의 시간이 차 안에서 흐르고 있었다. 


이제 나는 그를 찾으러 Laponia로 들어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erH0J28TpB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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