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고 느리게 보면, 얼마나 많은 행복이 우리 주변에 있던가
Laponia는 크게 4개의 대표적인 국립공원으로 구분이 되는데, Padjelanta, Sarek, Muddus, Stora Sjöfallet이 그것이다. 전날 지도를 펴놓고 어떻게 하면 다 돌 수 있을까를 고민했는데, 워낙 넓은 지역이라 12시간을 운전해도 세 곳만, 그것도 거의 날림식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경우의 수를 따져보니, 최대한으로 돌려면 사실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한 Naturum Laponia를 맨 마지막에 들러야 하고 그것도 두 시간 정도만 머물러야 했다. 고민이 깊어갔다. 다 보고 싶은데.
'그래도 보고 싶은 것부터 봐야지.'
나는 Naturum Laponia가 있는 Stora Sjöfallets/Stuor Muorkke 국립공원 쪽으로 향했다. 'Stora Sjöfallets'은 '큰 폭포'라는 스웨덴어고, 'Stuor Muorkke'는 '대량 수송(great portage)'이라는 뜻의 Sami족어(語)다. 둘 다 병기하는 것은 스웨덴 정부가 Sami족을 존중하는 의미도 있지만, Laponia는 Sami족어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는 것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행 중 만난 스웨덴인에게 물어봐도 "이건 아마 Sami족어일 거야. 왜냐면 Stuor, Muorkke, luokta 같은 단어들은 스웨덴어가 아니라 핀란드어하고 가깝거든. Sami족의 대부분은 핀란드에 살고 핀란드말과 그들의 말이 비슷한 경우가 많지. 그런 Sami족이 여기 많이 살아와서 지금도 그들의 언어가 여기에 많은 거 같애"라고 한다.
어쨌든 Stora Lulevatten 호수를 따라가는 길은 평일 오전이라 그런가 나 밖에 없었다. 이 호수에서 시작한 룰 강(Luleälven)은 460km를 흘러 북동쪽 대도시인 Luleå에 다다른다. 45번 국도에서 빠져 Naturum에 이르는 길은 1시간여 정도 되는데, 마치 나 혼자 이 넓은 데를 전세 낸 것 같았다.
전에는 이런 길을 드라이브한다면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막 소리 지르면서 미친 듯이 달리는 것을 꿈꿨다. 굳이 하나 꼽자면 Crying Nut의 '말 달리자' 같은 노래? 그래서 울랄라세션-체리필터-러브홀릭의 노래를 볼륨을 높여 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기분하고 안 맞았다. 마치 포스터물감으로 수묵화를 그리는 느낌?
오히려 처진달팽이의 '말하는 대로'를 틀으니 더 좋았다. 이렇게 내 맘대로 틀 수 있는 공간인데, 왜 신나는 노래가 맞지 않을까? 스스로 해석을 못 내린 채 내 입은 저절로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제 나에게는 스무 살의 빠른 곡보다, 이 노래같이 고민이 담긴 노래가 더 맞을 그런 나이여서 그런 걸까.
https://www.youtube.com/watch?v=-AonO5W1ZO8
어느덧 멀리 만년설이 보이는 산들이 보이면서 Naturum에 도달했다. 입구에서 300m를 들어가니 Naturum의 모습을 드러냈다. 지어진지 좀 돼서(2014년 완공) 그런가 생각보단 낡은 오두막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나두 나이 먹었으면서 뭘... ^^ 내부는 그냥 소박했다. 대충 둘러보고 나와서 주변 길을 돌았다. 이곳은 안내소의 설명보다 그냥 밖에 앉아있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았다.
항상 여행을 하면 사진만 찍고 다음 장소로 서둘러 옮겼던 내가, 오늘은 그냥 한 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만년설인 줄 알았는데,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또, 주변 바위들은 자주색을 띠는 사암(sandstone)인데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바위 위에 낀 초록색 이끼는 몇 천년 동안 바위에 붙었다는데, 그래서 아무리 박박 문질러대도 안 떨어진다. 그래서 그런가 자주색 바위와 초록색 이끼가 아주 예쁘게 잘 어울린다.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붙고 떨어지는 인간들의 군상에 찌들다 보니, 그들의 조합이 너무나 부럽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잠시 생각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1시를 넘기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45번 국도를 타고 Sarek 국립공원 입구의 Kvikkjokk 교회를 보거나 스웨덴 최고 수심을 자랑하는 Hornavan 호수를 다녀온다는 것은 거의 8시간을 더 운전해서 자정에 숙소로 돌아온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도... 언제 또 여기와 보겠어, 어차피 midnight summer라 자정에도 훤할 텐데... 갔다 와서 내일 오전 늦게까지 자면 되지... 하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점심은 가다가 챙겨 온 사발면에 온수를 부어 먹으면서 가는 거지 뭐. 액셀레이터를 밟으며 예상시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차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엔진오일이 부족하니 교체가 필요하다고. 젠장, 인제 달리기 시작했는데... 당장 차가 퍼진 것은 아니었지만, 한참 가다가 퍼진다면... 잘못하면 산골짜기에서 밤을 새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잠시 식혔다 시동을 걸어봐도 노란색 경고등은 계속 들어왔다. 렌터카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고 상황을 설명했으나, 상담원은 잠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깜깜무소식이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외진데 오면서 혼자 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었나라는 후회도 잠시 했다.
날은 전 세계가 여름 이상 기온으로 난리가 나서 그런지 스웨덴 북부임에도 온도가 33도를 넘고 있었다. 차를 좀 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차가 주차된 데가 있어 그 뒤에 세웠는데, 노부부가 돗자리와 카메라를 들고 내려 호숫가로 내려가길래 나도 따라 내려갔다.
겨울이 길어 햇볕이 귀한 스웨덴인들은 여름에 바다나 강가의 바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부도 그를 위해 이 호숫가를 찾은 듯했다. 전에 나도 다른 곳에서 보기만 하다가, 한 번 따라 해 볼까 하는 생각에 다시 신문지를 들고 내려가 바위 위에 피고 누웠다. 어 따땃하니 괜찮네.
누워서 생각해봤다. 차량 계기판에 뜬 경고등은 '너 또 오버해서 여행하냐'라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래 오늘 하루만 16시간 600km를 달린다는 것이 말이 되나. 나는 또 여러 군데 찍기식 여행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었다. 방금 전 Naturum에서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해놓고.
생각을 바꿨다. 여기 이 Stora Sjöfallets/Stuor Muorkke 국립공원이나 제대로 보고 돌아가자고. 그 길에도 볼 것이 많을 것이다.
생각을 바꾸니 당장 누워있는 바위 앞에 펼쳐진 Stora Lulevatten 호수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야, 여기 참 예쁜 호수구나. 이 옆을 달리면서 정작 이 물 한 번 만져볼 생각을 안 했다니. 얼마나 한심한가. 멈춰야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무진장으로 퍼져있었다.
다시 올라와 차의 시동을 걸었다. 경고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뭐 어때 쉬엄쉬엄 가지. 한 30분 가다가 얼마나 계곡물이 깊은 지 검은 물이 쏟아지는 길가에 차를 대고 사발면을 가지고 내렸다. 마침 여행자가 쉬어가라고 탁자도 있어, 라면에 물을 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상 최고의 미슐랭 6 스타급 식당이다. 조식 뷔페에서 집어온 삶은 계란은 오늘도 체내 가스 생산에 일조하고 있었지만, 어제 사우나에서처럼 눈치 보지 않고 부담 없이 시원시원하게 뿜어댔다. 야, 이게 대자연하고 하나가 되는 거야!라고 웃어대면서.
이후에도 차량 경고등은 꺼지지 않았지만, 슬슬 운전하고 오다 보니 다행히 숙소에 저녁이 되어 도착했다. 오는 길에 슈퍼에 들려 맥주와 각종 요기 거리를 사서 방에 돌아와 퍼지게 먹고 누웠다. 행복했다.
잠깐 자고 일어나 씻으려고 했는데 눈떠보니 다음 날 새벽이었다. 하루 종일 뛴 거리가 3백여 km에 불과했지만, 국도여서 피곤했나 보다. 커튼을 열어 밖을 보니, 이곳에서의 마지막 구경거리인 midnight summer 밤하늘의 별이 아닌 동이 트는 새벽 구름으로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나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녔다.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눕고 싶으면 누웠다. 마지막엔 차의 문제로 장거리를 뛰지 못했지만, 오히려 나는 앞으로 460km를 흘러 달려갈 Stora Lulevatten 호수의 물들을 느꼈고 지상 최고의 식당에서 라면을 즐겼다.
오늘 하루 일과는 지나간 나의 인생들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 것 같다. Laponia의 4개 국립공원을 하루에 600km를 달려서라도 가서 발을 디디고 사진을 찍으려 했던 것처럼, 너무나 많은 것에 욕심을 내고 정작 내 몸과 마음은 지치는 것도 모르게 달려온 건 아니었을까.
차라리 멈추고 느리게 보면, 남에게 보여줄 사진은 많지 않아도 달렸기에 보지 못했던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좀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세속적인 성공을 담보로 현재의 행복을 누르고 살면서,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은 양의 문제가 아닌 빈도의 문제인데 지금의 소소한 행복을 더 많이 누려야 하는 것을 너무나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눈물이 날 정도로 후회스럽다.
지난밤은 불면증도 없이 푹 잤다.
밖이 저렇게 밝은데도 말이다.
I'll never worry, tonight.
불꽃같이 살다가 40에 생을 마감한 ZARD의 리드보컬 坂井泉水의 노래 가사처럼.
https://www.youtube.com/watch?v=j9rax18Ig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