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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Aug 29. 2020

지구 한 바퀴,  그리고 서울둘레길

지구에서 가장 오래 인생을 같이 한 사람 - 엉아

911 테러가 일어나 모두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해외여행을 기피하던 2001년, 경찰청에 근무하던 나는 “태평양 상공에서 잿가루가 되더라도 외국 땅 한 번 밟아보고 싶습니다” 라는 강력한 메시지에 피식 웃는 국장님의 미소로 불안에 떨던 중, 운좋게 외사요원 국외 연수에 오르게 되었다.


옆 집 영어도 못하는 삼식이도 가던 해외 배낭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 나는 생전 처음 한국을 벗어나 미국 땅을 밟았다. 출생이후 28년 1개월만의 일이었다. 거기서 넓은 세상을 처음 보았고, 성문종합영어와 맨투맨을 베이스로 하는 내 영어도 통한다는 사실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지구 한 바퀴 돌며 살아 보고 싶다’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인류가 옥토끼가 사는 달에 착륙하는 꿈을 꾸었듯이 나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꿈이었다.         


세월이 지나 꿈은 이루어졌다. 세 번의 시험을 거쳐 정말 타잔이 이줄 저줄 간발의 차이로 건너 타듯이 간당간당하면서 외교부 전직에 성공했다. 기쁨도 잠시. 나이 서른넷, 중고 신인인 나는 새로 바뀐 냉엄한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텼다.


2년 후, 꿈에 그리던 해외 근무를 시작했다. 외교부에는 각 지역별 그리고 언어권별로 자신만의 경력을 쌓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달랐다. 정말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싶었다. 500년전 마젤란도 세계일주를 했다는데 나라고? 그러다보니 포르투갈-브라질-중국으로 이어지며 진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겉보기에는.


실상은 아마추어가 프로무대에 뛰어들어 초반에 엄청 얻어터지듯이 그렇게 살았다. 도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힘들었다. 담배가 유일한 친구였다. 해외 근무는 철저하게 외로움에 익숙해져가는 과정이었다. 시작하고 도전해서 여기까지 왔지, 그런데 답을 못 찾겠네였다.

   

그렇게 6년 반의 해외 근무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했다. 참 좋았다.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찹살 도너츠 사먹고 시장을 돌아다니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또, 친구들도 만나야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모든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40대 중반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은 모두 직장에서 살아남기위해 발버둥 치고 있어 만나면 정리하고 자리를 뜨기에 바빴다. 세상에 하나 뿐인 형을 만나도, 저녁에 술 한 잔하고 돌아서기 바빴다.


주말 등산도 혼자했다. 빨리 후딱 갔다 오려고. 어느 날 등산로 입구에 앉아 물을 마시다 ‘서울둘레길’이란 조그만 리플릿을 보았다. 서울 주변을 한 바퀴 도는 거였다. 157km. 마라톤을 세 번 완주하는 거리. 미친놈들... 저걸 왜 해...


그 후 두 달 만에 저녁에 만난 형에게 술김에 제안했다. “형, 우리 서울둘레길 한 번 가볼까. 맨날 이렇게 삼겹살에 술 먹다 헤어지는 것보다 최소한 건강에는 좋을 거 아냐.” “그럴까?” “그래보지 뭐” 아무 생각없는 즉흥 제안이었다.

    


2016.7.9. 서울둘레길 1코스(14.3km)를 시작했다. 초여름이라 무지 더웠다. 시작한지 10분 만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형보고 좀 쉬었다 가자고 했다. 운동도 별로 안한 주제, 첫 시도고, 30도가 넘는 날씨에 난이도도 유일하게 높은 ‘고급’인 수락-불암산 코스. 나중에 알고 보니 미친 짓이었다. 땀은 비오듯 나고 목은 마른데 물도 안가지고 갔었다.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형과 함께 걸어 6시간30분짜리 코스를 5시간40분만에 마쳤다. 그래도 했네? 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둘레길 도전 첫 번째 휴식. 날은 더운데 죽는 줄 알았다. 얼굴을 보면 쓰러지기 직전이다 ㅎㅎ


그렇게 시작한 형과 나의 둘레길 여행은 두 달에 한 번 꼴로 가을-겨울로 계속 이어졌다. 처음과 달리 날씨는 둘레길을 걷기에 더욱 좋아졌고, 요령도 생겼다. 특히 혼자가 아닌 형과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어느 새 막바지에 다다랐다. 우리 나이가 그닥 많은 것은 아닌데 우리 형제는 남들보다 참 할 말이 많았다.


둘 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부모와 떨어져 고모댁에서 자란 것부터 시작해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여곡절이 많은 유년 시절. 어머니도 장사를 시작하시며 집에서 단둘이 보낸 중고등학교 시절. 이후에는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는 바람에 거의 떨어져 살다가, 이젠 정말 한 달에 한 번 보기 힘든 형.


보기는 힘든 만큼 늘 생각하며 살다보니 아무 준비없이 만나도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형도 나도 이제 중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형과 함께 걷는 이 길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때로는 말없이 걷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설레이게 했다.     

체력도 붙고 날도 서늘해지면서 여유도 생겼다. 어느 늦가을의 추억.


그러다 나도 해외 출장이 잦은 부서로 옮기면서 한 동안 서로 둘레길을 함께하지 못했다. 어느 코스는 26km나 되다보니 무리하게 걷다가 족저근막염까지 생겼다. 주말에 누워있으면서 내년엔 다시 또 해외 발령인데... 한국에 있는 동안 이건 끝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둘레길에 오른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다보니 응원해주는 사람도 생겼다. 형제지간에 다툼이 많은 요즘, 둘이 같이 걷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부럽다는 내용들이었다. 둘레길 걷다가 중간중간 찍는 스탬프의 재미도 성취감을 가지게 해주었다. 어느덧 형과 함께하는 이길은 나에게 생긴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다. 두세달 마다 겨우 이어진 우리의 동행은 2019.6월 마지막 8코스인 북한산 34.5km를 남기고 있었다. 나는 이미 8월 해외 근무가 예정된 상황이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마무리를 져야만 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정말 길었다. 그래도 걸었다. 즐거우면서도 이제 이 코스를 끝내고 다시 몇 년 뒤 한국에 돌아와 50대의 나이에 지금 같은 체력으로 다시 형과 걸을 수 있을까라는 서글픔도 들었다. 하지만 지나온 그 길들을 다시 갈 수 없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걸어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9.6.16. 우리는 드디어 3년 전 시작했던 도봉산역에 다시 돌아왔다. 완주를 증명해주는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그런데 형은 스탬프를 찍는 것은 별 관심이 없었다. 실제 중간중간 찍지도 않아 완주증명서도 못받게 되었다. 그 많은 시간을 들였는데. 그의 얼굴에는 ‘그냥 같이 해서 좋았어’라고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치고 어느 식당에서 막걸리를 나눈 뒤 형과 헤어졌다. 다음 주 나는 둘레길 사무소를 들러 완주증명서를 받았고, 8월 한국을 떠났다. 형과 함께 했던 그 추억들을 가지고.     

지나보니 닭도리탕 앞에두고 한 잔 걸치는 막걸리가 주는 청량함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도 찾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로 형은 50이 되었고, 나도 곧 50이 된다. 이제 우리 나이에 무슨 그렇게 거창한 꿈이 있을까. ‘지구 한 바퀴 돌며 살아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보다 형과 함께 서울둘레길을 완주했다는 사실이 더 아름다운 나이가 되었다.


점점 이제는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기 보다 정리하고 지켜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앞으로 내 앞에 놓여있을 길에 그저 몇 명만 동행하고 싶고, 그래서 계속 함께할 수 있다면, 조용하지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020.8.29. Stockho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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