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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pi Apr 30. 2022

50살의 내가 20살의 나에게  01

'야, 그건 어차피 이렇게 되는 거였어.'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남들이 걸렸다는 얘기만 듣던 코로나에 걸렸다.


목요일 외교부에 업무차 방문해 1시간 동안 침 튀겨가며 얘기했는데 상대의 침도 만만치 않았나 보다. 금요일 아침 정말 출근하기 싫을 정도로 몸이 찌뿌둥했는데 밤부터 목이 붓기 시작하더니 토요일에는 열, 기침, 두통이 종합세트로 다가왔다. 좀 자면 나질 꺼야 라는 생각으로 버텼는데...


일요일에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진단키트로 검사했더니 두 줄이 나왔다. 아, 나도 걸렸구나. 어제 검사하라고 할 때 하지 그랬냐는 아내의 원망을 들어가며 아닐 거야라는 생각에 아내가 교회에 간 사이에 다시 한번 검사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아픈 머리를 베개에 눕히고 하염없이 잤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감기가 잦더니 나이 먹어도 그렇냐..."

셋째 외삼촌 결혼식장에서. 감기를 달고 다녀 늘 목을 두름.

형의 카톡을 잠깐 확인하고 앉아있으려 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거워 다시 누웠다. 할 것이 많은데...라고 이래저래 생각하다가, 지금 몸 상태론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시 자자고 누웠다. 잠이 올 수 있도록 기침만 좀 잦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또 잠이 깨는 것 같다. 무슨 생각을 할까... 하다가 다시 또 아파져 오는 머리에 다른 걸 생각할 수 없다. 아까 형이 말한 대로 나는 기관지가 약하게 타고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처럼 자주 감기에 걸리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 감기 걸린 나를 둘러업고 안절부절못하던 엄마 생각이 났다. 목에 수건을 감기고 알약을 잘 못 삼키던 나를 위해 알약을 부수어 숟가락에 물에 개어 나를 먹이던 엄마.


아주 어릴 적 4~5살 때 보일러 가게에 연결된 단칸방에서 모든 식구들이 잠들어 있는 방 한 편의 희미한 전등불 아래 아버지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나에게 약을 먹이던 그 엄마가 생각이 났다. 그때 겨우겨우 약을 삼키며 엄마에게 물어보았던 것 같다.


"엄마, 나도 크면 감기 안 걸릴 수 있을까?"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40년이 넘어도 넌 여전히 감기에 잘 걸리고 있다고, 그러니 체력 좀 키우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아 또 하나 있구나. 알약도 이제는 하루에 몇 개씩 넣을 정도로 잘 삼킨다고.






아픈 머리로 일어날 수 없어 누운 채로 쭉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봤다.


그래...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까. 지금의 상태가 바뀔까. 아니면 지금의 결정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형의 관악 국민학교 입학식(1978.3월)

수많은 궁금함과 질문을 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이려 가능한 예측 하려고 했지만 그게 맞아떨어진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지금 근무하고 살고 있는 스웨덴조차 발령이 결정되기 몇 달 전에도 이렇게 거의 3년을 채워가며 지낼지 몰랐으니.   


그러다 보니 내 나이도 벌써 한국 나이로 오십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인생의 2/3를 살았고, 요즘 추세라면 1/2이 될 수도 있는 나이다. 모로 보나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나이가 되다 보니, 예전 가졌던 그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야, 그건 어차피 이렇게 되는 거였어.'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또, 그렇게 말해준다면 그 당시의 나는 어떻게 대꾸할 건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예를 들면, 30년 전인 92년 대학 입학과 대학시절의 선택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겪었던 고민들, 그 시간 동안 변해갔던 인간관계들... 50이 된 내가 20대 이후 나에게 얘기해줄 것이 상당히 많을 것 같았다.



1991.12.17.


1992학년도 대학 입학 학력고사가 치러졌다. 이유 없는 무덤 없다지만 몇 달째 앓아온 위장염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 그해 학력고사는 쉽게 출제됐다는 평이었지만, 가 채점을 해보니 나는 오히려 평소 모의고사 점수보다 훨씬 점수가 안 나왔다. 예상대로 나는 떨어졌고, 어 이러다 평생 학벌이 '고졸'로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싸였다. 다만, 지원했던 대학이 그렇게 원해서 지원한 건 아니어서 아주 낙담한 건 아니었다.


어느 동문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고3 담임 선생님의 사진

해가 바뀌어 1월 내내 방황했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하는 생각에 친구 군성이와 함께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재수할 맘을 먹었으면 돈이 없더라도 수업료 전액을 면제해주는 학원에 넣어주겠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당시 우리 집 사정을 아셨는지 학교 다닐 때도 가끔 자신이 출판사에서 받은 참고서나 문제집을 주시곤 했는데, 떨어진 제자에게도 이렇게 신경 써주신다는 점에 너무 고마웠다.


다음날 종로학원에 시험 치러갔다. 젠장, 재수학원도 시험 쳐야 되나 했는데, 고3 때 그 학원에서 주관한 모의고사 성적을 기준으로 시험을 면제해주는 명부가 있다 해서 크게 기대 않고 보니 다행히 우리 고등학교 명단에 내가 꼴찌로 들어가 있었다. 이야! 기분 좋게 바로 등록할 수 있었다. 


아, 올해는 이런 개재수가 있으니 뭔가 좀 되려 나보다 생각하고 등록을 한 뒤, 한 보따리의 교재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마을버스에서 대학에 붙은 친구가 오늘 학교에 책상에 둔 물건 가지러 갔다가 선생님이 나를 찾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집에 돌아와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일 졸업식장에서 말씀드리겠지만, 학원에서 한 눈 안 팔고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그런데 선생님은 의외에 말씀을 하셨다.


졸업 후 28년 만에 찾은 모교 정문 앞(2018.4월). 참고로 나는 서울 대원고등학교를 92년 졸업한 12회 졸업생이다.

"야, 니 경찰대에서 전화 안 받고 뭐했노?"

"오늘 학원 갔다 와서 집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대학에서 전화 안 받는다고 교무실로 전화했다."

"왜요?"


"뭐 예비 입학 과정인가 입학 전 교육과정에서 하나 퇴교했는데... 네가 예비합격자 명단에 있단다."

"에?"

"부모님한테 말하고 내일 학교로 가보거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다만, 바로 부모님에게는 전화했고, 잠시 후 대학에 확인을 해보셨는지, 좋아서 난리가 나셨다. 밖에 계시던 부모님들이 일찍 들어오시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셨다. 얼른 내일 아침 용인으로 가야 하니 일찍 자라고.


그날 내 방에 누워 이른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나에게 행운일까, 아니면...

내가 지원했던 그날부터 지금 까지를 반추 해보았다.


그러다 잠이 들어버렸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수없이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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