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속이기 in Sweden 외전(5)
가끔은 내가 이렇게 살았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런 생각 자체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마무리를 지을 때가 많다. 지나간 시간이고, 다시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부질없는 경우가 많고, 고정된 과거를 바라보는 심경은 그러기에 더욱 아쉬움이 감싼다.
그런데 가끔은 돌아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과거에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그것이다. 영화를 못 봤던 이유는 많지만, 사실 돈이 없다기보다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 푹 빠져 느껴볼 만한 그런 마음적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One Day' 같이 원작을 읽다가 DVD를 사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동안 직접 사거나 중고시장에서 모은 DVD만도 라면 박스로 몇 상자는 될 것 같은데, 꺼내 보기는 커녕 여전히 잠자고 있으니.
젊었을 때는 승진, 돈 등 현실적인 것에 집착하다 보니 잠깐만의 시간이면 누렸을 영화, 콘서트, 미술... 그런 것들을 못 누렸던 것이 아쉽다.
나이가 들었다 해도 여전히 그런 습성은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기보다는 유튜브에 짤막하게 나오는 영화나 넷플릭스 드라마 소개 동영상으로 몇 십분 만에 보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사실 예전에 TV '주말의 영화'를 보던 시절에 비하면, 바로 그 영화를 찾아 간단히 전체 스토리를 알 수 있는 인스턴트 시대에 너무 당연한 일상이다.
오늘도 할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소파에 앉아 늘 그렇듯 검색을 하는데, 우연히 2000년에 개봉한 '동감'이란 영화의 18분짜리 소개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아, 저거... 시간을 초월한 두 남녀가 무전송신기로 소통한다는 그런 영화 아니었나? 임재범이 OST를 불렀던... 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본 적은 없었다. 2000년이면 내가 27살 때구나. 벌써 23년 전이네. 그때 뭐 했지? 남양주라는 한 시골 경찰서에서 수사과에 근무했었지. 근데 그땐 만나는 여자도 없어서 저런 영화도 못 봤지.. 한 번 봐볼까... 뭔 내용인지나 보자 하는 생각에 동영상을 눌렀다.
아... 근데.. 영화의 내용은 너무 괜찮았다. 단순한 무전송신의 얘기가 아닌 그 시절 누군가에게 있을 것 같던 판타지 같지만 판타지 같지 않은 추억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79년에 살고 있는 영문과 여대생 윤소은(김하늘 분)은 짝사랑하는 선배(박용우 분)와 단짝친구 허선미(김민주 분)와 대학 생활을 보내던 중 우연히 고물 무선기 하나를 얻게 되어 집에 가져온다. 개기월식이 진행되는 어느 날 밤, 그 무선기를 통해 신기한 교신음이 들려오고 그 목소리는 같은 대학 광고창작학과에 다니는 지인(유지태 분)이라는 남학생의 목소리였다. 소은은 대화를 터가며 점점 친숙해진 지인과 학교 시계탑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2000년의 서울에는 아마추어 무선통신에 열광하고 있는 한 남자, 광고창작학과 2학년생 지인이 있다. 미지의 공간, 미지의 사람과의 교신에만 열중하던 그는 어느 날 낯선 여자로부터 교신을 받는다. 그녀는 같은 학교 영문과에 다니는 소은. 이후 그는 그녀와 학교 시계탑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소은은 공사 중이라 완공되지 않은 시계탑 앞에 서서 2시간을 넘도록 기다린다. 지인도 시계탑 앞에서 장대비를 맞으며 소은을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학교 시계탑은 이미 완공된 상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만나지 못해 각자 화가 난 둘은 다시 시작된 교신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1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교신을 주고받았던 것. 이후 무선통신을 통해 짝사랑의 고백과 우정, 서로가 살고 있는 세상, 또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들을 나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다른 시간 속에서 각자의 사랑과 우정을 얘기하며 가까워지고 그리움까지 싹트게 된다.
"거기선 누군가를 열심히 사랑하면 이룰 수 있는 방법도 있나요?"..
"하하.. 그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발명되지 못할 거예요."
그러던 중 소은은 교신을 통해 2000년대 살고 있는 지인의 부모도 같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을 교신 중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부모의 이름을 듣고 그들이 바로 자신이 짝사랑하고 있는 선배와 지금 그 단짝친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소은은 지금 선배와 단짝친구가 사랑을 시작하고 있으며, 교신하고 있는 지인이 그들의 아들이라는 것과 사실을 알고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들의 시작된 사랑을 막을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시간을 거쳐 캠퍼스의 담벼락을 하루종일 손으로 만지고 집으로 돌아온 소은은 마지막 무선을 보낸다.
"나, 그 사람의 향기를 알아요. 언제 어디서고 눈을 감으면 맡을 수 있어요. 그 사람과 나, 우린 분명 같은 감정으로 살아요. 같은 슬픔, 같은 기쁨, 같은 향기를 지니면서 그렇게 살 수 있어요. 1979년의 이 기분을 2000년에서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자신으로 인해 지인이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소은은 아프지만 선배에 대한 사랑을 접고 마지막 무선을 남긴 뒤 무전기를 꺼버린다. 지인은 부모의 대학 앨범을 통해 소은의 존재를 확인하고, 어느 대학 영문과 교수로 살아가고 있는 소은을 찾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그 대학 한 강의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소은과 마주친다. 소은도 지인을 알아보고 멈칫한다.
잠시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소은은 옅은 미소를 띠고 아무 말 없이 지인 앞을 지나간다. 지인도 몇 천 마디 말보다 더 한 그 의미를 알고 집으로 돌아와 더 이상 무선이 되지 않는 무전기에 대고 마지막 무전을 보낸다.
"오늘 당신을 봤어요. 정말 예쁘고 밝았어요. 아주 잘 살고 있고요... 소은 씨 옆을 스치는데 소은 씨가 말해주던 향기가 났어요. 그 향기가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었어요."
영화를 보고 '야, 이 영화가 이렇게 좋은 영화였다니."라는 탄복이 나왔다(이 영화의 관람객 평점은 9.67). 지금보다 감성이 좀 더 메마르지 않은 그때 이 영화를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서도, 세월을 돌려 그때 보고 싶었지만 못 본 이 영화의 감동을 오늘에서라도 느끼니 이 또한 얼마나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에 운전을 하면서 이 영화의 OST로 유명한 '너를 위해'도 불러보고, 나도 지금 2000년대 누군가와 무선을 한다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보았다. 아니 앞으로 나가 2050년 누군가와 한다면? 아내에게도 설명해 주니 "어머, 나도 그냥 무선 교신하는 단순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하면서 신기해했다. 영화는 주말 오후의 무료함에서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지나간 영화를 몇 십 년 후에 보고 행복해하던 기억은 많이 있다.
카사블랑카(1949), 더티댄싱(1988), 지금, 만나러 갑니다(2004년) 등등... 인스턴트 시대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나는 과거에 지나친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소은이 지인과 교신하듯, 나는 영화를 통해 그때의 나와 교신하고 느끼고 감동한다.
어렸을 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상상이 몇 십 년이 지나 내 눈앞에 펼쳐진다면, 몇 십 년을 거슬러 올라 과거의 존재를 오늘 느끼는 것도, 아주 오래된 친구를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처럼 50을 살아가는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 같다.
다음 주, 나는 또 어떤 영화를 찾아볼까. 노트북? ET?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공포의 외인구단? 생각만해도 즐겁다.
나이가 들었다면, 누구나 한둘은 가지고 있을 오래된 친구, 보고싶었던 영화를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