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년'을 버리고 , '현재'를 인정하여 '미래'를 향하여.
과거가 화려할수록, 과거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옛날에 잘 나갔던 경험이 있을수록, 왕년을 잊기 쉽지 않다.
힘들었던 일인 지언정, 그것들의 경험들을 온전히 씻어내기란 쉽지 않다.
강렬한 경험이 있을수록, 그 경험들을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모두 다 가지고 있었다.
영광도 고통도.
그래서 과거에 단단히 매여 있었다.
과거가 화려했다.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전국 경시대회 경력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상도 탔고, 심지어 전국 2등 상을 가진 경력도 있었다. 공부로서 성공을 볼 줄 알았으나, 결국 보지 못했지만, 그 과거 화려한 경험들은 나의 발목을 잡아 내가 '왕년에 ' 그랬었지...라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했다.
공부와 학력뿐만이 아니었다. 직장도 그랬다. 나름 여자로서는 어디 가서 이름만 대도 '우와, 좋은 직장이었네'라고 칭송을 들을 만한, 꽤 보기 좋은 대기업, 외국계 기업에 솰라 솰라 외국어 쓰는 멋지게 차려입고 강남 한복판에, 광화문 한복판에서 일하는 그런 '메인 시티'에서 일하는 핵심 부서 직원이었다.
그런 화려한 과거는 항상 나의 익명의 삶을
더욱더 어두워 보이게 하는 찬란한 태양 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가 찬란할수록, 나의 현재의 보잘것없는 익명의 삶을 강하게 내리쬐면서, 지금의 삶을 굉장히 보잘것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누구 엄마'로 살아가는 삶은 성취감을 밖에서 찾기가 꽤 힘들었다. 아무도 나 자신의 삶, 나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렇게 잊혀 가는 존재감 속에서 나는 더욱더 '과거의 영광'에 빠져 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왕년에 내가 말이지...
이쁘기도 하고, 공부도 좀 했고, 회사도 좋은데 다니고, 외국인들하고 솰라 솰라 사업도 하고 말이지...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나의 모습은 '왕년'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사실 뒤돌아 보니, 주변의 모든 엄마들이 그랬다.
왕년에 한 미모 하던 사람들이었고,
왕년에 그래도 꽤 뭔가에 두각을 나름대로 나타내던 사람들이었고,
왕년에 그래도 밖에 나가면 재주 하나씩은 있던 그런 이들이었다.
왕년은 나만 가진 것이 아니었다.
괜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나의 왕년을 잊기로 했다. 내 과거가 어떻든 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내 과거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현재 내 모습을 가지고 승부를 보겠노라고 굳게 결심했다. 지질하게 , 내가 왕년에 어땠고 저땠고 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군대 다녀와서 평생 군대 얘기만 하는 만년 상병 같은 지루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현재 나의 모습이 필요했다. 나의 모습을 돌아봐야 했다.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인가.
지금 별로 내세울 것 없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을 내세우는 삶을 살고 싶은가.
오랜 시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과, 이미 내가 가진 것들, 내가 해온 것들로부터 내가 앞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Do what you can do,
Love what you do.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과연 사랑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내가 '과거에 어떠했음'을 버리고,
현재 내가 가진 '역할들이 무엇임'에서 벗어나,
미래를 꿈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로 나를 설명하고 규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아이들, 남편, 가족들이 아닌, 오롯하게 '나'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나'를 규정하는 새로운 화두들을 마련해 낼 수 있을까.
누구 엄마,
누구 아내,
누구들의 딸,
누구들의 며느리,
누구들의 가족..
이 모든 페르소나, 사회적 역할로부터 벗어나서 그저 내 이름 석 자로 우뚝 설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서려면, 내게는 지금 무엇이 필요하며 , 향후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어떤 것으로 앞으로의 나를 채워나가고 싶은가.
그렇게 ,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스스로 우뚝 서는 나의 이름 세 글자로서의 삶을 다시 꿈꾸고 있었다.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벗어나, 내 이름 TJ Kim이라는 간판 아래, 내가 나를 설명하고 가꾸어 나가야 함을 새로이 느끼면서, 앞으로 나를 무엇으로 채워나가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물론, 나의 '왕년'을 버리면서 느꼈던 회오리 같은 방황은 뒤로한다.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빈 공간'에 불과했다.
공부를 잘하는 10대 학생도 아니고,
예쁘장해서 어딜 가도 칭찬 듣고 인기 있는 20대 대학생도 아니고,
똑 부러 지게 일을 잘하는 30대 커리어 우먼도 아니었다.
내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채워나갈지는, 지금 현재 발 디딘 나의 현주소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했다.
나는 현재 적당히 늙고, 적당히 능력 없고, 적당히 인생의 어중간함 속에 위치한
40대 경력 단절된 아줌마였다.
정확히 그 지점으로부터 나의 미래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 서서, 몇 날 며칠이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미래는 앞으로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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