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앉아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그날,
나도 모르게 결심한 것이 있다.
정신적으로 다시 ,
독립해야겠다.
이는 이혼과는 다른 문제다. 꼭 이혼을 한다고 해서 독립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독립을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혼이나 물리적으로 '혼자 사는 것'이 아닌, 나의 정신적인 독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립이란, 나 스스로 혼자 서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서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현재 신랑에게 기대어 있는 상태로, 말 그대로 내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다시금 나 자신에게 상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정신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면 그렇게 서운하다.
경제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원망스럽다.
정서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그리 밉다.
정체성을 '그의 아내' '나의 아이들의 엄마'로 설정하고 있으니, 아내나 엄마의 역할로 인정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떨어진다.
이 연결 고리를 끊어내야 함을, 그리고 다시 홀로 내 이름 석자로 다시 설 수 있는 가치를 찾아내어 스스로 독립해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어떻게 독립해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곰곰이 생각하다가 처녀 시절부터 마련해 왔던 내 노후연금을 털었다. 내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투자의 밑바탕에는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있었다.
내가 지금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42세의 나의 나이에서 정확히 20년을 빼기로 했다.
오늘부터 나는 22세다.
22세의 옛날의 나를 돌이켜보면, 지금이 그때의 나라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정년을 60세가 아닌 80세로 늘려서 내 지금 나이가 42세가 아닌 22세라고 생각하고 내 삶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 자신에게 곰곰이 묻기 시작했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내 것으로만 꾸며진 내 방을 따로 꾸려 독립을 꾀했다. 침대와 옷가지와 나의 책들을 가지고 조그만 방에 내 살림을 꾸렸다. 신랑과는 안방에서 만나서 수다를 떨고 좋은 시간을 지내되, 밤 저녁에는 꼭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책을 보든, 글을 쓰든, 음악을 듣든, 개인적인 시간을 지내면서 내 삶에서 남편을 제외했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알아보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나를 '나'이지 못하게 하는 인간관계를 먼저 끊기로 했다. 내 이름 석자가 아닌, 내 남편의 아내, 내 아이들의 엄마로만 살게 하는 역할로서 나를 대하는 인간관계를 끊고 싶었다. 그 중심에 죄송하지만 시어머니가 계셨다. 유독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없고, 어떤 '역할들'로서의 나만 느껴졌고, 그래서 통화하고 나면 친절한 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당분간 시어머니와 단 둘이 전화하는 소통을 거부하기로 했다. 연락은 신랑과 아이들과 단체로, 일주일에 한 번씩 안부 화상 통화로만 하기로 했다. 그 외의 전화는 한동안 수신 차단을 해 두었다.
아주 작은 레터링, 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타투를 갑자기 하고 싶어졌다. 42세의 나이에 타투를 한다면 생뚱맞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어떤 계기로 기존과는 다른 어떤 세계로 진입하는 신호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단숨에 예약을 했다.
처녀 때부터 모아 오던 노후 연금을 큰 맘먹고 털어, 내가 꿈꾸던 작은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하늘이 보이는, 통창으로 된 예쁘고 아늑한 공간이다. 아쉬운 대로 내가 집과 조금 동떨어져서 '나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만큼은 되는 공간을 애써서 만들어 놓았다.
나의 공간에서 무엇을 할까... 힘들여 새로운 것을 하기보다는 내가 40년 살면서 가장 잘해오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심리학, 영어 그리고 요가
모두가 전문가에게 로고를 맡기라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그린 그림을 고집했다. 미숙해도, '내 것이어야만' 하는 독립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내 손길이 묻어난 것으로만 꾸미고 싶었다. 그래서 미숙한 졸라맨 그림이지만, 그대로 명함을 팠다.
굉장히 독특한, 어쩌면 이질적인 세 가지 분야 (요가, 영어, 심리학)가 한 데 모였다. 그 구심점은 오롯이 '나'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사업은 성공해도 실패해도, 상관없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그 여자'의 이름을 되찾고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문제였다. 남편으로부터, 아이들로부터 내가 '독립' 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그들을 뺀 내 삶에서 무엇이 남는가를 계산하는 뺄셈 문제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덜어내니 오롯이 남은 것이 그 세 가지였을 뿐이었다.
즉, 나의 삶 자체가 나의 미래의 일이자 사업,
그리고 나의 새로운 정체성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42세가 아닌 '22세'라고 나 자신의 인생의 시계를 20년 되돌리고, 마음가짐을 다시 고쳐먹고, 차근차근 나의 독립을 준비해나가고 있었다.
#세 아이엄마
#익명의 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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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프로젝트
#40 대가 아닌 2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