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재능과 결핍
익명의 여자가 된 세 아이 엄마, 한 남자의 아내, 한 시댁의 며느리로 살던 그녀는 문득 앉아서 자신의 과거 삶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익명의 누군가의 '엄마' 가 되기 전의 과거 삶의 역사에 대해서. 그녀로 하여금 익명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게 되었던 그 원동력에 관해 .
극성맞은 엄마 덕에 두 살 때부터 천자문과 한글을 뗐고, 네 살 때 미술학원을 갔으며, 다섯 살 때 너무 어리다며 더 키워 보내라시던 피아노 선생님께 한 번만 가르쳐보고 판단하시라 우겨서 피아노를 쳤다. 그래서 다섯 살 때 단칸방에 고가의 피아노가 반쯤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만 함께하는 삶이 초등학교까지 계속되었다. 엄마와 공부하고 엄마의 음식을 먹고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엄마 가슴을 조물딱 거리며 잠들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매일 공부하는 것이 낙이던 그 시절, 학교 시험은 올백을 맞고 별명은 '컴퓨터 머리'여서 애들이 내 머리카락을 장난 삼아 뽑던 때, 내 어린 인생의 유일한 유머이자 오아시스였던 오빠는 내게 흔쾌히 약속을 했다.
내 동생, 서울대 수석 입학 하면~
오빠가 학비 다 대 줄게!
거만한 우물안 개구리 초등학생과 돈 없는 오빠의 의미 없는 거래.
그렇게, 내 초등학교 꿈은 무려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이었다. 아니, 우리 엄마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 옛날 고등학교 입학식 선서를 여자가 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엄마는, 그 시절 모두 그렇듯, 남자 형제들을 교육시키느라 대학은커녕 그 어떤 뒷바라지도 꿈도 꾸지 못했다. 아마, 서울대 수석 입학은 그녀의 꿈이었을 거다.. 난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차라리 친구들과 춤추고 놀러 다니는 삶이 더 재미있었다. 그 짧은 시간, 몸은 쓰는 쾌감을 느꼈던 것을 보면 공부보다는 몸을 쓰는 것이 내 꿈의 목표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 나의 삶을 탐구할 만한 여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빠가 어느 날 죽었다.
실종 일주일 뒤 시체로 돌아왔다.
집안이 뒤집어졌다.
그날 이후로 집안이 난리였어서 그런가,
난 학창 시절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고 잠만 잤다.
밤이면 울부짖는 엄마 소리에 잠을 못 자면 내일 학교 가야 되니 어쩌지, 반장인데 수업 시작과 끝 인사해야 되는데 걱정하다가 방에 장식되어 있던 독한 양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취해 잤다. 학교에선 술이 덜 깨서 잤다. 이 반 반장은 왜 이모냥이냐며 선생님들이 잠 덜 깨서 인사 못하는 내게 한 소리를 하고 나갔다. 아 몰라 나는 이래저래 잠만 잤다. 주말은 금요일 밤부터 자서 일요일 저녁에 일어나서 엄마가 죽은 줄 알고 들여다볼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학교 성적은 유지했으나, 전부 벼락치기였다. 학교 성적을 유지해야 구박받지 않았다. 엄마 아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시험 기간만큼은 기를 쓰고 벼락치기를 해서 성적은 유지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넌 왜 그리 학교에서 자냐고 물으면 제가 밤에 공부를 좀 했다 대충 변명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소문이 났다.
쟤가 밤에 고액과외받는다고.
저게 선생들을 무시한다고.
그렇지만, 새벽마다 울부짖는 엄마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엄마를 욕되게 하는 것 같아서 그 당시에는 그렇게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너무 피곤했다. 그렇지만 버텨냈다.
밤마다 울며불며 소리치는 엄마의 밤과 새벽도
학교에서 선생 무시하냐며 다그치는 낮시간도
무시하며 무기력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쟤는 왜 저렇게 학교에서 잠만 자냐고 핀잔을 줘도
신경 쓸 틈이 없이 그냥 잠만 잤다.
하지만 가끔, 느낀다.
내가 맘먹었더라면, 진정 원하는 것이 있었더라면
밤에 잠만 좀 더 잘 수 있었더라면,
너무 힘들지 않고 내 삶에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었더라면
무섭게 전진할 수 있었음을. 내 무서운 몰입력으로.
그런데 잠을 잘 수 있게 된 날부터도 그것이 번번이 막히고 표류하는데, 뭔가를 원하고 꿈꾸고 나아가는데 나를 뒤로 붙잡아 끌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애정, 보살핌, 관심이었다.
유년 시절 갑자기 잃어버린 엄마의 애정과 오빠의 보살핌, 그리고 아빠의 관심.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혼자 세상에 갑자기 덩그러니 남겨져버린 그 유년시절의 경험이 너무나도 컸다. 그 커다란 홀을 메꾸지 않으면 내가 능력이 어떠한들 그다음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조차 없었다.
수능이 왕창 망해 재수를 하겠다 마음먹고 일단 어디든 가자 라며 대충 간 대학교에서는, 들어가자마자 연애에 빠져서 재수는커녕 적성도 찾거나 살리지 못하고 학위만 대충 챙겨 졸업했다.
뭐든 내가 하려고만 한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이 신념과 실제 능력을 지난 13년간 온전히 '현모양처'와 '안정적인 엄마' 가 되는 데 사용했다. 내가 가졌던 결핍 '안정된 엄마와 가정'을 기어코 이루는 데 사용했던 것이다. 나의 결핍이었던 불안정한 엄마를, 내가 내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엄마'가 됨으로써 나 자신을 치유하고자 했고, 깨져서 엉망이었던 가정을 '안정적으로 돌봄으로써'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결핍을 보상했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의심만 버린다면.
이 신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고,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걸 이제까지 내 꿈보다는 애정, 그리고 나의 베이스캠프를 찾는 데 사용해 왔다.
그래서, 사랑한다 생각했던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단지 거리끼는 것이 있었다면, 그가 우리를 모두 감당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을까 라는 점이었을 뿐.
지금까지도 나는 나름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데 몰두했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나의 결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그들의 베이스캠프가 되기로 마음먹었었다. 나의 경우처럼 애정과 사랑, 가정의 결핍이 그들 재능의 앞을 가로막는 일이 정말 없기를 바랐다. 훌륭하고 편안한 베이스캠프는 아니더라도, 일단 대충 있기만 해도 그들은 나중에 정신적으로도 거기서 충분히 쉴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서 외로움이 아닌 충만함을 느끼길 바랐다. 내가 느꼈던 유년시절 여행과 주택의 다채로왔던 삶이 그들에게도 깃들길 바랐다.
요즘 드는 생각은...
난.. 과연 내 결핍도 차곡차곡 채워가는 중인가?
물론, 우리 아이들에겐 정말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 매일 아침 문을 열면 앞집 고양이가 밥 달라고 냐옹.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와 잔디밭이 지척이다. 자주 버럭 거리는 엄마여도, 집에 왔을 때 엄마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훨씬 좋다고 이야기해 준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 친구들도 대접해 주고. 내가 혹여 호구라도, 기꺼이 아이들 친구의 호구 엄마가 되어 줄 수 있다. 그들이 오는 시간에 집에 대기한다.
그러나 진정 나는, 내 삶의 문제도 같이 해결해 가는 중인 건가?
문득 가끔, 아이 셋 낳은 선녀 이야기가 떠오른다.
물론, 잘한 것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
내 결정이었고, 내 선택이었고,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 상황이다.
현재.. 나는 어떠한가.
나의 재능은 결핍에 의해 어떻게 방해받아왔는가.
아니면 어떻게 발현되었는가.
앞으로 나의 이 결핍은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
이제 '현모양처' '안정적인 가정'의 꿈은 이룬 듯하다. 충분히 해본 듯하다.
과거는 흘려보내고,
앞으로의 '나'에 대해 다시 꿈꿔야 할 시기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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