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는 누구인가
몽파르나스역으로 가서, 산티아고 드 깜포스텔라로 가는 기차를 끊었다.
생장 피 드 포르. 이름도 생소한 역이었다.
8월이지만 산을 넘자면 추울 터, 가자마자 한 일은 피레네 산맥을 앞두고 도톰한 플리스 옷을 한 벌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1Q84 2권을 읽고, 한 달간의 걷기 여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배낭을 짊어지고 피레네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걷는 여정 중에 가장 높은 산맥이 첫날 있다니. 첫날 그림 같은 풍경을 뒤로하면서 낑낑대며 오르던 날 첫 느낌은 딱 이거였다.
등 뒤에 내가 짊어진 배낭이 너무 무겁다!
아니, 가방에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야?!
피레네 산맥을 헉헉대며 오르다가 비탈진 길가에 앉아서 제일 처음 한 일은 , 내 가방을 뒤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짐을 모두 꺼내어 지금 내게 꼭 필요 없는 쓸데없는 것들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슈에무라 클렌징 오일 두 개,
지금 생사가 걸려 있는데 이런 쓸데없는 클렌징 오일이 웬 말이람??
두꺼운 1Q84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아니, 지금 바깥 풍경 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녁에 들어가서 언제 책을 본다는 거야?
여행 다니면서 입었던 예쁜 원피스들 ,
지금 산티아고 길에서 이 옷을 입을 일이 추호도 없을 것 같은데 , 적어도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그 외에 잡동사니들,
지금 내 어깨를 무겁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을 골라내어 미안하지만 피레네 산맥 한 구석에 살포시 놓아두었(?) 다.
내가 골라낸 필수품들은, 속옷과 양말, 그리고 최소한의 등산복들과 세면도구. 작은 사진기, 그리고 침낭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필요한 물품들은 그게 다였다. 골라낼 때는 버리고 가는 것들이 혹시나 나중에 필요하면 어쩌지라고 걱정했으나, 앞으로의 산티아고 길에서 그 물품들이 아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옷은 딱 두벌뿐이라서 매일매일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해서 빨아 널어야 했고, 양말도 딱 두 켤레라서 매일매일 빨아 널어 신어야 했다. 사진 찍을 시간도 별로 없어서 사실 눈으로 보기 바빴고, 즐기기보다는 걷기 바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맨 처음 했던 일이 배낭을 들여다보며 내 등짝이 무엇이 달라붙어 나를 이리 힘들게 하는지 보았던 것이었던 것처럼, 나는 내 인생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한 달 동안 걷게 될 산티아고 순례길은, 도대체, 내 인생에 무엇을 짐짝처럼 영혼 위에 짊어지고 다니는지 생각하는 여정이 될 것임을 알아차렸다.
<신은 죽었다>라는 책으로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영혼 단계를 세 단계로 구분하였다. 낙타, 사자, 그리고 어린 아이다.
낙타는 남이 지어준 짐을 등짝에 짊어지고 무겁게 사막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존재다. 자신의 자유의지가 없는 상태로 힘든 '주어진 삶'을 사는 존재다. 반면, 사자는 '나는 하고 싶다. 원한다'라고 으르렁 거리는 존재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영혼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 삶과 싸우지 않고 순응하면서도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어린아이'의 단계까지 발달한다고 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그 당시의 나는 낙타였다.
내가 짊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짐과 부담들이 , 사실 나와는 상관이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욕망, 다른 사람들의 가치, 다른 사람들과 사회의 요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몸은 차분하게 걷고 있지만, 머리는 과거를 빠르게 회상하며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과거들을 훑고 있었다.
걷기가 얼마나 동적인 활동인지, 한 달 동안 걸어보니 알 것 같았다.
내 온갖 과거가 줄줄이 끌려 나오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내 뇌 구석에 꼬깃꼬깃 구겨박혀 있던 기억들과 감정들이 새어 나오는 듯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내 발걸음이 하나하나 쌓여갈 때마다 내 몸속에서 그때의 감정들이 국물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막을 수 없게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온몸이 자극되고, 다양한 감정들과 기억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내가 마주해야 할 물음들이 나의 과거 기억들과 감정들을 뚫고 나에게 직진해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나'였다. 성질이 달라졌다고 한다면, 이전의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변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이제껏 가려져 있었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감추어져 있었던 나의 본성이 나인가?
아니면 덮여 있던 페르소나를 비롯한 그것들이 나인가?
그런 혼란스러운 질문들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내게 매번 달려들어 내 대답을 요구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답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나'를 찾는 것,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것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겐 아름다운 무지개와, 해바라기, 그리고 나를 반기는 염소나 말들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살아있어 느끼고 있음. 그게 바로 '나'였다.
사실, 나는 내가 원하는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을 뿐, 그저 살아있어 생생하게 이 세상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그 순간 '나'라는 존재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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