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몬 헌터스>, 새로운 전쟁

총칼에서 목소리로, 전쟁의 무기가 바뀌다

by 실루엣

전 세계를 흔들어놓은 케이팝 애니메이션 〈데몬 헌터스〉를 혹시 보셨나요?
아이들의 열렬한 반응 덕분에 저도 자연스레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신나는 노래, 팬시한 스타일 속에 한국적인 것이 가득 담긴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영웅담이지만,

그 안에서 저는 조금 색다른 것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총칼이 아니라, 목소리로 싸우는 시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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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전쟁이라는 오래된 질문에 다시 닿게 되었습니다.

“전쟁이란, 결국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돌아보면, 인류는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 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싸움의 도구와 방식이 달라져 왔을 뿐이지요.
살육의 전장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서도 전쟁은 늘 진행형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요.

칼과 창에서, 제도와 사상으로, 그리고 돈과 목소리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무기는 바뀌어왔고, 그 변화는 곧 시대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었지요.


전쟁의 대표적인 다섯가지 얼굴


총칼의 시대 ― 힘이 곧 정의였던 시절

역사의 초입에서 전쟁은 말 그대로 무력의 대결이었습니다.
누가 더 날카로운 칼을 쥐었는가, 누가 더 많은 병사를 이끌었는가가 곧 생존을 결정했죠.

알렉산더, 칭기즈 칸, 나폴레옹 같은 이름들은 모두 피의 영광과 함께 기억됩니다.
그들에게 힘은 정의였고, 무기는 곧 세계를 열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력만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무기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시대에 따라 변해갑니다.


제도와 신분의 시대 ― 전쟁이 남긴 긴 그림자

칼과 총은 사라져도 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무력으로 얻은 승패는 제도 속에 굳어져 세대를 넘어 사람들을 속박했으니까요.

봉건제와 카스트 제도, 식민지 체제 같은 장치는

총칼보다 더 은밀하고 오래 지속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 이미 패자의 자리에,
누군가는 태어남만으로 승자의 자리에 올려졌습니다.

전쟁은 더 이상 전장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삶 전체가 지배와 복속의 질서 안으로 편입되던 시대가 있었지요.


명분과 종교, 사상의 시대 ― 머릿속의 전쟁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았습니다.
단순한 무력이나 제도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의 정신을 사로잡는 것, 바로 사상과 종교등의 명분이 새로운 무기가 되었죠.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의 언어로 사람들을 불러냈고,

십자군은 '보이지 않는 신'을 앞에 내세우고 처절하게 싸웁니다.


20세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를 둘로 갈랐습니다.

“옳다”는 주장, “우리에게 이롭다”는 명분은 총칼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현실에 그대로 재현되어,

우리는 또다시 싸우고 상대를 제거하고 우위를 점하려 애씁니다.


돈의 시대 ― 보이지 않는 총칼

21세기 문턱에서 전쟁은 다시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이제 무력도, 사상도, 전면에 서지 못합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자본이었습니다.

경제 제재, 무역 분쟁, 금융 시장의 격동이

군사력보다 더 전면에 나서서 크게 국가의 운명을 흔들었습니다.


돈은 보이지 않는 총칼이 되어, 삶과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무기를 꼽으라면, 여전히 돈을 빼놓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의 목소리조차 숫자와 거래의 언어로 환산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목소리와 창조의 시대 ― 서사의 전쟁

목소리가 곧 ‘싸움의 무기’가 된다는 설정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비추는 은유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전환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총칼도, 제도도, 사상도, 그리고 돈조차도 세상을 단독으로 지배하지 못하는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힘.

그것은 이제 목소리와 서사에서 비롯됩니다.


수많은 SNS와 유튜브 채널, 그리고 세계를 흔드는 케이팝의 무대까지.
더 많은 귀를 붙잡고, 더 많은 마음을 흔드는 목소리가 새로운 전장의 승패를 가릅니다.

어쩌면 전쟁의 무기는 이미 목소리로 옮겨붙은 것이 아닐까요.
정치조차 유튜브의 구독과 조회수로 세를 모으는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우리의 목소리에 담긴 가치와 서사'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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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다섯 가지가 시간의 흐름처럼 가지런히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총칼의 전쟁은 지금도 곳곳에서 반복되고,
제도와 신분은 여전히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규율합니다.
사상과 명분은 국경을 넘어 충돌하고,
돈의 힘은 여전히 거대한 무기로 작동합니다.


역사의 층위는 늘 겹치고 중첩되어 있기에,
어떤 무기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무기와 함께 공존합니다.


다만 특정한 시대를 규정하는 힘의 중심축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면,
칼과 창에서, 제도와 사상, 그리고 돈을 거쳐,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목소리와 서사의 힘으로 향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우리 대신 싸워주던 과거와 달리

이제 우리 모두의 참전을 요구하는 세상이 왔다는 걸 알리는 것 같습니다.



침묵이 남기는 빈자리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래된 문장처럼 들리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울림이 있습니다.
목소리의 시대에 침묵은 곧 퇴장이 되기 쉽습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그 자리는 왜곡된 주장이나

비뚤어진 선동으로 채워지곤 하지요


철학자 니체는 또 다른 각도에서 경고했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

기존 가치 체계가 무너진 시대의 공허를 가리켰습니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단순히 신의 부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세우려는 의지가 멈출 때 찾아오는 허무였습니다.

비어 있는 공간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창조적 의지가 그 자리를 메우지 않는다면, 허무가 대신 스며듭니다.
그래서 목소리가 단순히 크다고 해서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무엇을 담아내고, 어떤 세계를 열어가려는 목소리인지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지요.


정복이 아닌 극복의 서사


이 지점에서, 한국의 서사는 조금 특별한 자리에 놓입니다.
우리는 제국처럼 다른 나라를 정복한 역사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수많은 침략과 억압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고 극복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힘이 없어 그랬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남을 정복하러 나갈 때보다, 침략해 들어온 누군가를 몰아낼 때

우리 국민의 특성인 '냄비 근성'을 아주 효율적으로 잘 발휘하는 것 같거든요.

그렇게 훅 뭉쳤다가 다시 흩어져 빠르게 식어 제 갈길 가는 민족적 특성이

우리의 '정체성의 위기'를 시험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발휘되었던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언어를 빼앗기려 할 때 노래와 문학으로 언어를 지켰고,
정체성을 흔들려 할 때 오히려 더 뿌리 깊이

“우리는 우리 것을 지킬것이다”는 고집 센 목소리를 길러왔습니다.


내가 나로 서는 것, 우리가 우리의 것을 잃지 않는 것,

그렇게 본연의 모습을 빼앗기지 않는 것을 노래하는 견뎌내고 극복하는 서사.
그리고 바로 그 극복의 목소리가 지금 빌보드 1위를 차지한 노래 GOLDEN에 녹아 있습니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닌 우리 '함께' 의 이야기로 말이죠.


We're goin' up, up, up, it's our moment
우린 올라가, 더 높이, 지금이 바로 우리의 순간
You know together we're glowing
함께일 때, 우리는 더 빛난다는 걸 알잖아
Gonna be, gonna be golden
우리는, 반드시 황금처럼 빛날 거야
Oh, up, up, up with our voices
목소리를 높이며, 끝없이 올라가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우리만의 빛
Gonna be, gonna be golden
우리는, 반드시 황금처럼 빛날 거야
Oh, 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
숨지 않아, 난 본래 빛나도록 태어난 존재니까
Oh, our time, no fears, no lies, that's who we're born to be
두려움도 거짓도 없는 지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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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얘기하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인 것이다.”


그의 말은 단순한 격언을 넘어, 창조적 목소리의 근원을 짚어줍니다.
진정한 창조는 거대한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리에서 길어 올린 진솔한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목소리가 세계를 울릴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정복이 아닌 극복의 경험,
가장 개인적인 상처와 회복의 이야기,

그것이 집단의 서사와 겹쳐져 세계 속에서 울림을 얻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미래


우리는 이제 누구를 흉내내지 않아도 스스로 주목받으며 빛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흔드는 것은 더 이상 총칼이 아닙니다.
오늘의 전장은 매혹적인 목소리와 서사에 의해 열리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창이 될 수도, 방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날카로운 창으로 휘둘러 타인을 지배하려 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방패처럼 세워 자신을 보호하며 버티려 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그 목소리의 힘이 어떤 결을 지닐 것인가를 묻는 일이 아닐까요.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스가 서로 다른 이유로 노래했듯이 말입니다.


서로를 더 크게 숨 쉬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목소리,

그것이야말로 전쟁을 넘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시대의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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