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녀의 이야기- 남겨진 아이, 그리고 아빠.

by 실루엣

Double Loss, 이중 상실.



가족 중의 형제를 잃은 경우, 남겨진 아이는 자신의 형제와 더불어 부모를 잃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심리학에서 쓰인다. 아이를 잃은 충격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는 부모 밑에서, 남겨진 다른 아이들은 죽은 형제와 동시에 부모를 모두 잃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이런 심리적 상황을 심리학에서는 '이중 상실 Double Loss' 이라고 한다.



어느 심리학자가 가장 처음 이 용어를 사용했는지는 불분명하며, 아직 이에 대한 연구결과나 이론들은 많지 않은 상태이다. 심리학에서도 그닥 관심 없는 주제라는 방증이겠지..


오빠의 죽음 후, 그 소녀의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헤매고 있었고, 그 소녀의 아버지는 시종일관 어머니를 거두느라 진땀을 뺐다. 평소 오빠와 사이가 좋지 않아, 오빠가 있을 때는 집에서 잘 못봤는데 오빠가 죽고 나서 명예퇴직을 서둘러 신청하시고 집에서 엄마를 돌보셨다.


참 다정하다고 해야하나, 엄마의 분노를 그래도 한 번 맞받아치거나 같이 덤비지 않고 받아내며 집에서 송송송 된장찌개를 끓이는 가정적인 아버지였다. 딸에게는 한없이 자상했고 부드러웠다. 야단 한 번 맞아본 적 없이 귀여움만 받고 자란터라 무섭지 않은 아버지였기에 평소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항상 문제는 엄마와 그 소녀와 충돌할 때 일어났다.


분명 그 소녀가 엄마에게 요구한 것은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 내 영역을 그만 침범해라, 방문 그만 벌컥 벌컥 열어라, 일기 몰래 그만 훔쳐 봐라, 그만 좀 간섭해라, 라면 먹고 싶어서 하나만 좀 먹으면 안되냐, 짜장면 한그릇 먹고 싶어 시켜먹었다, 세수 좀 이따가 하겠다. 물론 그 중에 그 소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춘기의 반항기라든가 다은 이유들이 있었을 수는 있었겠으나 기억하건대 그리 큰 별 큰 이슈가 없었다.


그런 사소한 이슈들로 또다시 집안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말 안듣는 천하의 못된 딸이 되어 엄마의 대성통곡을 듣고 있는 게 너무도 짜증이 나서 가만히 앉아 이를 갈고 있으면, 아빠가 다급하게 그 소녀의 방에 쫓아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절박하게 다그쳤다.


넌 왜 이렇게 애가 못됐어? 왜이렇게 이기적이야? 너만 생각해? 엄마 속상한 거 안보여? 니가 엄마 이해 좀 하고 그냥 넘기고 엄마 말 좀 들으면 될걸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넌 왜 이렇게 못됐니?

-넌 애가 왜 그러니 지금 정신 있니?

-아들 죽은 엄마가 지금 얼마나 힘들겠니 ?

-그냥 니가 대충 참고 넘기면 되잖아 !

-그게 뭐 그렇게 큰거라고 그거 하나 못넘기니?

-엄마가 널 얼마나 생각하는데 넌 너만 생각하니?

-엄마는 지금 얼마나 힘든데 넌 맨날 네 입장만 얘기하니?


그럼 내가 내 입장을 이야기해야지, 누가 대신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아빠는 엄마 편이고, 내 입장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내가 내 입장을 얘기 안하면 어쩌란 거야? 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그 소녀는 입 꾹 닫고 자신이 과연 정말로 그렇게 이기적이고 못된 행동을 했었던가 되돌아보곤 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내게 가장 소중하게 남은 저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이기적이고 못됐나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그럼 내가 내 입장 대변하지 누가 내 입장을 대변해 그럼! 이 집에서 내 입장 대변해 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내가 싫다는 거 싫다고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게 당연한거지, 그게 이기적인거야?? 싫다는데 참으라고 하는 엄마 아빠가 이기적인거지! 난 싫고 힘들다고! 그만하라고들!!!!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법을 나이 서른 즈음에서야 배웠다. '이상하게 전 슬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는데 퇴근길에 지하철로 한강만 지날때면 자꾸 눈물이 펑펑 나요' 라며 급하게 찾아갔던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울타리도 기댈 곳도 없네요. 힘들지만 스스로 지켜내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 소녀는 그 말을 듣고서는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도, 이 세상에 내 편 들어줄 사람 하나 없다는 외로움과 서글픔이 밀려오면서 스스로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이 위태위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에리도록 시리고,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래도, 열심히 울타리를 쌓는 법을 차근차근 배우고, 후에 자라면 기대서 쉴 수 있을법한 나무도 심으며 나의 욕구들과 필요들을 조금씩 보살펴나가기 시작했다. 초라하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안타깝게도 그 사춘기 시절, 나의 가장 소중한 편이었던 오빠를 잃은 내 옆에는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엄마와, 그 옆에서 엄마 편을 들며 사춘기를 시작한 내게 '엄마 말을 얌전히 듣고 고분고분할 것'이라는 과도한 희생을 요구하는 아빠만이 남았다. 그 셋의 투쟁은 불보듯 뻔했으나, 형제 잃은 어린 소녀는, 자식 잃은 부모를 어떤 방법으로든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래서, 엄청난 무기력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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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그리고, 학습된 무기력처럼 성인이 되어서도 그 무기력은 꽤 오래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폭발적인 감정반응을 일으켰는데 나는 나의 '내면아이' 를 알고 있음에도 그 분노하는 아이를 그 때마다 힘들게 진정시켜야만 했다. 예를 들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내 상사가 내 편을 들지 않고 그 사람 편을 든다던가, 내 친구가 내 상황보다는 다른 이의 상황을 이해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할 때. 나는 쉽게 관계에서 철수해 버렸다. 그리고, 이 내면아이의 문제는 후에 결혼생활에서도 결국 큰 갈등을 불러일으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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