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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롥호롞 Feb 12. 2020

지나치게 자신을 알려주려고 하면 덜 매력적이게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상대방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알고 싶어 지게 된다. 또한 내가 상대방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만큼 나 또한 상대방에게 나를 알려주기를 원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가능한 상대방에 대해서 많이 알기를 원하고 또 가능한 자신을 상대방에게 알려주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많이 알게 되면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이 사랑받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그리고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어지게 되면 과연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받게 될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삶에서 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듣고 접하기 때문에, 안다는 것을 선으로 모른다는 것은 악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모르는 것이 없는 것을 성숙으로 모르는 것이 많은 것을 미성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여러 종교에서는 어린아이처럼,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만약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어지면 어떤 식으로 대해야 사랑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서 원하는 만큼 사랑을 주고받으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신처럼 전지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 이상은 어렴풋이, 막연하게 알 수밖에 없다.


그저 막연히 로또의 번호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또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서 바라고 원하는 것들을 훨씬 쉽게 이루게 될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쉽게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앎을 통해서 얻는 만족이란 모름이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일상적이지 않은 낯선 경험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내가 매일 보고 듣고 느끼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서 여행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여행을 가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여행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느끼고 있는 상태라면 어떨까? 가본 적이 없는 여행지, 그 안에서 일어날 새로운 경험들이 더는 새롭지 않고, 매일 경험하는 일상과 다를 것이 없다면 어떨까? 그래도 우리는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여행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맛있는 음식, 맛집을 가고자 하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은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밥과 김치 같은 맛이 아닌 맛집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을 느끼기 위해서 맛집에 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맛집에 가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이미 맛을 다 알고 있다면 어떨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항상 그 맛을 느끼고 있어서 내게 맛집의 맛있는 음식도 밥과 김치처럼 일상적인 음식과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진다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알 수 없기 때문에 느껴지는 두근거림이나 설렘, 혹은 익숙하지 않은 경험에서 오는 즐거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새롭다는 것은 기존에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경험을 의미하며 모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내가 어떤 일이나 사건, 사람에 대해서 ‘신선하다’, ‘새롭다’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 일이나 사건, 사람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전혀 새롭지 않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익숙한 동네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여행은 일상과는 다른 새로움을 느끼기 위함이며 새로움이란 몰라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 내가 사는 동네는 너무 잘 알아서 전혀 새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익숙하고 일상적이어서 어떤 것도 새롭지 않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즉 궁금한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기 전에 궁금한 게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같이 느껴지며, 어디를 가도 우리 동네처럼 느껴지고, 어떤 일도 오랫동안 해왔던 일처럼 느껴지며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나도 마치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만나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다면 어떨까? 마치 오래된 동네 친구처럼 그 사람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 보여주기 싫어하는 것, 그 사람의 치부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어지게 된다면 우리 눈에는 그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나 혹은 책이나 만화 속 주인공을 보는 것처럼 생명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그 사람의 인생을 전부 알고 있으며 그 사람은 내가 아는 그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난다고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오늘 몇 시, 몇 분에 어떤 말, 어떤 행동, 어떤 생각을 할지 내일 몇 시, 몇 분에는 또 어떤 말,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할지 전부 알고 그 사람이 내가 아는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이미 접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난 그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어떨 때 내가 상대방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또 어떨 때 상대방이 내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것을 추구한다. 더 사랑하기 위해서, 더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상대방에게서 알지 못하는 뭔가를 발견하고, 알고 싶어 졌을 때이다.  


왜 오래 만난 사람에게서 처음과 같은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설렘 혹은 매력이라고 느끼는 부분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하거나 느꼈을 때 찾아오는 것인데, 알지 못하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 것도 없어지고 나니 상대방에게서 매력적이라고 느낄만한 부분도 같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흔히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때, 상대방이 나를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알고 싶게 만들 수 있는 뭔가를 매력이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자 혹은 여자가 어떨 때 이성을 섹시하다고 느끼는지를 살펴보면 적당히 알고 적당히 모르는 부분에서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너무 많이 알려주면 매력이 떨어지고 너무 많이 알면 상대방을 덜 매력적으로 느끼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끼를 부린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에 대한 앎을 조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끼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적당히 알려주는 것, 곧 적당히 보여주고 적당히 감춰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끼가 있는 이들은 적당히 자신을 보여줄 때 궁금하게 만들 수 있고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많이 사랑받고 많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자신을 알려주지 않고 지나치게 상대방을 많이 알고자 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가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기심 혹은 궁금증이 생겨날 수 있는 여지를 둘 수 있어야 상대방에게 매력적일 수 있고 또 상대방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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