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가족들과 함께 한편씩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매력 있지만 간호사 분들과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낸다. 이번 시즌 초반에 아이의 심장이 좋지 않아 기증을 기다리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힘든 시간을 서로 격려해주는 보호자들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에피소드를 보다 문득 아버지 투병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보호자님들 생각이 났다. 아버지와의 마지막을갑자기 중환자실로 들여보냈다.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 일 1회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병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남긴 글 초안이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12년 동안의 투병생활이라 늘 집에는 특유의 긴장 상태가 있었다. 시간 앞에서 우린 무뎌지기도 했지만, 느닷없는 시간에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나 병원에서 한 번씩 호출이 올 때마다 비상이 걸리곤 했다. 이젠 정말 어려운 걸까? 걱정부터 앞서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혼났지만 비상소집 훈련처럼 그 과정을 수십번 반복했다.
아버지의 60~70대는 병원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폐암 수술, 그 후 5년 뒤 식도암수술, 다시 5년 뒤 장폐색이라는 병이 계속 따라오고 있다. 중간중간에 심근경색, 폐렴 등의 다른 문제도 있었다. 큰 전투 두 번을 겪으시고 국지전들이 계속 발 생면서 점점 야위어 가는 아버지를 뵙게 되었다. 그렇게 부산에서 서울까지 긴 거리를 마다하고 12년을 병원이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전화가 왔다.
이번엔 어머니가 일요일 새벽 2시에 전화를 주실 정도니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큰 고비는 어젯밤에 넘긴 것 같다고는 했는데 아버지가 살아가실 날이 많이 남으시지 않으신 것 같다고 괜찮을 때 한번 얼굴을 보고 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응급차로 간 부산의 모 병원까지 가는 길 내내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같이 보냈다. 정신도 맑으시고 웃음을 보이실 정도로 가족들을 배려하려 하셨다. 절대 아프지 말라며, 본인은 침상이 작아서불편하니 너는 더 고생할 거라 건강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이번에도 이렇게 아프시다가 다시 회복하실 것 같았다. 매번 그렇게 크고 작은 전투를 하고 계시고 우리는 그렇게 아버지를 곁에서 도와드리고 있었다.
원래대로였으면 그날 밤 일요일,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종일 아버지가 계셨던 처치실에 있었다. 예정보다 하루를 더 부산에 머무르기로 했다. 거짓말 같이 그날 밤, 갑자기 호흡이 점점 힘들어지면서 상태가 심각하다며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코로나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있던 중환자실 면회도 없어진 채, 24시간 전담 간호사분들의 보호를 받으며 계신다.
그 뒤, 며칠을 병원에서 어머니와 보냈다.
있다 보니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병원에 오기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 이 사람들 간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끈끈한 정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시로 아버지의 상태를 물어보고, 본인들이 갖고 있던 경험을 스스럼없이 공유해주곤 했다. 먹는 음식을 나눠주는 것은 기본이요, 아버지와 어머니께 따뜻한 위로의 말을 서로서로 나누셨다.
병동에서 자주 뵙던 분들만 그런게 아니었다. 중환자실 복도에서 들어가보지도 못한 불안감 때문에 몇기간씩 그 앞에서 기다렸다. 그 근처 자판기 커피를 뽑으려고 했는데 동전밖에 되지 않는 구형 제품이었다. 동전을 구하기 어려워 난감해 하는데 일면식도 없던 분이 5백원짜리 동전을 말없이 주셨다.
며칠 뒤, 중환자실에 계속 계실 것 같아 아버지 병실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짐을 정리하고 아직까지 퇴원하지 못하신 분들과 헤어졌다. 아버지도 안보이시고 어머니도 안보이셔서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눈치가 중환자실로 들어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디 물어보기가 그래서 궁금하셨다고. 고생 많았다고 얼른 회복하라는 덕담을 남기고 본인들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듯했다.
참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마치 몇 주간 합숙 훈련이나 교육을 받는 사람들 같다고나 할까? 투병이라는 공통적인 환경 속에 끈끈한 전우애를 안고 가는 사람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많이 도움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적인 도움을 가득히 받았다.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게 이리 특별하다는 걸 알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
아버지는 끝내 중환자실에서 나오시지 못하셨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아버지 생각이 자꾸 난다. 나는 아직도 부산에서 아버지의 일상을 조용히 즐기고 계실 것만 같다. 그리고 12년 동안 아버지 병실에 계시던 보호자님들이 생각난다. 마지막 병상에서 만났던 분들은 아버지 장례식장까지 찾아오셨다. 그분들을 뵈면서 가슴이 너무나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