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신간 '일인칭 단수'를 읽었다.
소설집? 그동안 소설과 수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출간하다 보니 단편 소설집이라는 게 좀 생소했다. 최근에 소설을 참 안 읽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책을 주문하면서 같이 주문했는데, 오자마자 손에 잡은 건 이 책이었다.
1.
총 8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있다.
단편 소설임을 감안해도 각 편들 분량이 몇페이지 되지 않아 가볍게 읽혀진다. 내용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수필인지 소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있는 듯해서 소설집이라는 걸 모르고 보면 그냥 수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2.
하루키 다운 설정과 표현들이 곳곳에 가득해서 지루하지 않고 술술 읽힌다. 첫 소설 '돌베개에'부터 그 다운 표현들이 보여서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정신 질환이라니! 그런데 묘하게 공감된다.
3.
제일 울림이 있었던 소설은 두 번째 실려있던 '크림'이다.
한 노인과 주인공의 대화에서 나오는 이 표현이 인상적이다.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노인과 주인공의 대화를 옮겨본다.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런 원은 수학 시간에 배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 물론이야. 당연하지. 학교에서는 그런 걸 안 가르치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학교 같은 데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거든. 자네도 알다시피"
"그런 원이 정말 실제로 있나요?"
"있다마다." "그런 원은 분명히 존재해. 하지만 누구의 눈에나 보이지는 않지"
"어르신한테는 보이나요?"
"알겠나, 자네는 혼자 힘으로 상상해야 돼. 정신 차리고 지혜를 쥐어짜서 떠올려보라고.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그렇게 진지하게 피나는 노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조금씩 그게 어떤 것인지 보이거든."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크림?"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다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그게 '크렘 드 라 크림'이야. 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
수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모순된 개념인데, 하루키는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노인의 이야기처럼, 모순된 것들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도 진지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겨우 인생의 모순이 조금씩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중심이 있는 원이라는 표현처럼, 내가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살다 보면 여러 원들을 받아들이고 빠져나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인생이라는 의미일까?
머릿속에 평평하고 어두운 대리석에 얇게 퍼져있는 물의 표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걸 들여다보면 퍼 저나 가는 원들이 수십 개가 펼쳐지고 원이었다 퍼졌다 부딪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4.
다 읽고 나니 작가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필 선언을 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작품을 내놓겠지만, 그의 신간을 몇편밖에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책 속에 보이는 문장 속에 표현이 올드하다거나 진부하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집 내내 자전적인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고, 논란이 될만한 표현을 불편할 양만큼 들어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못생긴 여자였다' 같은 표현이 의도적으로 빈번히 나온다. 그리고 음악, 옷에 대한 취향도 소설집 속에 많이 드러난다.
더 이상 내 취향과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이? 10~20대 초반이 아니면 저 정도 연륜이 쌓이면 가능한 걸까?
5.
앞으로도 계속 그의 책을 보고 싶다.
같이 책을 읽은 A 씨는 내가 안타까워 한 부분들 정확히 불편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와 취향을 너무 드러내는 것이 싫었다고. 그의 수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다지 큰 부분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그렇게 느낄만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심이 여러 개 있는 원'의 무게감.
이 문장 하나가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다. 언젠간 그 의미가 지금과는 좀 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 예감과 함께.
※대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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