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타고 세계일주]
고국을 떠나온지 42일이 지난 날이었다.
러시아, 미국, 멕시코 그리고 콜롬비아를 지나 페루를 향하는 남태평양 항해길이었다. 105일 간의 순항훈련 일정의 1/3이 지났지만 아직 반 이상이 남아있어, 많은 승조원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던 시점이었다.
"알림. 적도제 시작 15분 전. 승조원 총원 비행갑판에 집합 15분 전."
적도제란 말 그대로 적도를 지날 때 하는 제사로서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포르투갈 선박이 적도를 통과하면서 한 의식이 유래라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17세기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선박이 위험한 해역을 통과할 때 해신(海神)에 대한 희생을 표시한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처음에 수업시간에 적도제라는게 있다는 걸 들었을 때 바람 한 점 없어 파도도 높지 않은 적도에서 왜 제사를 지내는지 의아스러웠던 적이 있다. 위험한 부분이 하나도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교수님께서도 내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셨는지 미소를 지으면서 말씀하셨다.
"범선 시대에는 바람이 없는 것이 두려움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무풍지대는 몇 달이고 묶인 채 머무르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많은 배들은 승조원들의 큰 희생을 치를 수 밖에 없었겠지. 때론 현재의 기준이 아닌, 과거의 기준대로 과거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상 수업 끝."
범선 시대가 저물고 엔진으로 배를 움직이는 동력선 시대인 요즘에는 적도에서의 위험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지만, 과거의 전통을 없애지 않고 승조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하나의 문화로 활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것이 적도제의 영어 표현인 Neptune's revel이다. Neptune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로마 신화식 이름이고 revel은 사전적 의미로 흥청거리며 벌이는 축하라고 하는데, '해신의 축하파티'라는 말이 딱 요즘의 문화와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포세이돈 대신 자랑스러운 '용왕님'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는 점 빼고는.
"용왕 승함!"
보통은 가장 재치있는 승조원이 용왕님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등장하게 되는데,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은 함장님을 부르는 일이다. "함장은 얼른 나와 예를 갖추어라" 함장님을 부르기만 해도 승조원들은 재밌어 하는데, 우리 배의 No.1을 이렇게 오라가라(?) 할 수 있는 상황이 몇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모든 시나리오를 알고 계시는 적도제 행사 결재권자인 함장은, 용왕님이 마음에 드는 제물을 바치라고 호통을 치실 때 못 이기는 척 '모든 승조원 평일 휴무권'이라는 선물을 바치고 자리로 돌아간다.
가장 중요한 휴무권을 손에 얻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고조되어 메인 이벤트가 시작되는데 바로 용왕님의 배신자를 찾는 시간이다. 용왕님께서는 불로장생의 꿈은 잊어버리셨지만 아직까지도 본인을 속인 토끼에 대한 괘씸한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계셨기에 주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토끼를 찾기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토끼로 선택되는 사람들은 순항훈련전단의 작전참모, 군함의 작전관이나 갑판장처럼 군기를 담당하는 간부들로 이 역시도 많은 승조원들이 재밌어 하는 요소이다. 그들을 앞으로 불러와 토끼는 춤을 잘 못 췄다면서 춤을 한 번 춰보라고 하기도 하고, 어지러움을 잘 느꼈다는 토끼의 특징을 발견해내기 위해 코끼리코 10바퀴를 돌리게 시키기도 한다. 마침내 잡힌 토끼에게는 곤장형을 내리게 된다. 군기담당 간부들이 춤을 잘 추기 위해 노력하고, 어지러움을 참다가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승조원들이 웃고 떠들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는 것이다.
"용왕 하함!"
용왕님이 모든 노여움을 푸시고 하함하시게 되면 이제부터는 파티의 시작이다. 비행갑판에 여러 개의 바베큐 그릴을 설치해서 삼겹살, 목살, 소세지를 구워 먹으면서 승조원들끼리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다음 기항지에 내려서는 뭐할꺼냐? 가족들 선물들은 샀어? 여자친구랑은 안 헤어졌냐? 등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면서 순항훈련전단의 승조원들 그리고 우리 생도들의 긴 항해의 스트레스는 조금씩 줄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