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타고 세계일주]
아침점호란 무엇일까.
아침점호에 대한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아침점호에 대한 단상들을 가볍게 적어본다. 군대나 기숙사 등 단체생활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아침점호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하루종일 열심히 살고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뉘운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게 하는지. "총기상, 아침점호 시작" 방송으로 울려 퍼지는 활기찬 목소리가 얼마나 나를 안 활기차게 하는지. 게다가 그냥 체조로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보까지 한다면? 그런 아침점호를 설레할 만한 사람은 당직사관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적은 간부인가) 무튼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약간 PTSD가 오려고 하는데, 아무리 "너희들은 장차 해군을 이끌어 갈 장교가 될 해군사관생도들이다"라는 자부심을 부여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아침잠을 이겨내고 점호를 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총기상 15분 전, 아침점호 시작 15분 전. 알림 금일 아침점호는 구보 실시할 예정. 사관생도 총원은 체육복 착용코 부두 앞에 집합할 것. 이상 당직사관"
- 으, 무슨 샌프란시스코에서까지 구보야. 빨리 구경하러 나가고 싶은데
- 해병대 갈 사람들만 뛰면 되지 않나? 해군들은 배에서 쉬자
- 아니 근데 저 버스들은 뭔데?
방송이 울리자 100여 명의 투덜이들은 다들 각자만의 곡소리를 한 번씩 낸 다음 부스스한 머리 위에 체육모를 눌러쓰고 부두로 우르르 나오기 시작했다. 투덜이들이 서 있는 부두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 시간대의 부두는 딱 그 정도의 어두움을 가지고 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검은색 말고 약간의 빛을 가지고 있으나 제 스스로가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하는 듯한 검정과 회색 그 사이의 어두움. 바다 역시도 그보다 약간 더 짙은 무채색으로 빛이 내리는 곳의 물결만 살짝 살랑이고 있었다. 그 어스름의 새벽을 버스의 밝은 불빛만이 애써 몰아내려 하는 모양새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언제 곡소리를 냈냐는 듯이 어느샌가 오와 열을 맞추어 아침점호 인원보고를 빠르게 끝내버린 4년 차 프로투덜이들은 버스에 타라는 지시를 받고 자연스럽게 버스에 올라탔다. 나처럼 아직 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생도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버스에 몸을 맡겼다.
버스 위로 올라타자 외부의 어둠을 몰아내려고 애쓰던 밝은 불빛들은 버스 내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 잠기운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새로운 침실을 맞이한 생도들은 체육모로 얼굴에 들어오는 빛을 차단한 채로 자도 자도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일부 생도들만이 커튼에 고개를 내밀어 차창 밖으로 우리를 스쳐 지나는 풍경들을 구경했다.
“자, 다들 일어나라! 언제까지 잘래? 날도 좋은데 뛰러 나가자”
얼마쯤 지났을까. 왠지 모르게 혼자만 설레 계시는 당직사관님의 목소리에 우리들은 일어났다. ’으, 더 자고 싶은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올만했지만 우리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생도생활 4년이면 불만이 있어도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노하우 정도야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대충 뛰고 얼른 돌아와야지 하며 버스 밖을 나섰는데 대충 뛰기에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풍경이 너무 이뻤다.
우선 버스를 타고 오는 시간 동안 새벽이 언제 사라졌지? 싶을 정도로 세상이 밝아져 있었다. 축 처지던 어둠의 막이 내린 밝은 세상에는 보이는 것들이 많아졌는데 푸르른 나무들 사이에 잘 닦여져 있는 산책로, 그리고 산책로를 따라 시선을 옮겨보면 시원한 바다와 빨간 다리가 보였다. 금문교. 샌프란시스코의 명물 금문교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현수교라는 타이틀로도 유명한 이곳은 다른 다리에게 가장 큰 현수교의 타이틀을 내주었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긴 현수교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존재다. 우리 어렸을 적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같다고 해야 할까. 아 설마 요즘 아이들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모르려나. 나도 MZ인데.
무튼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이름답게 황금색일 것 같은데 의외로 붉은색인 그곳을 걷고 뛰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런 로망이 있지 않은가, 고달픈 일상을 열심히 살다가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떠난 해외여행지에서 아침 바람을 느끼고 멋진 풍경을 보며 성공한 사람처럼 여유롭게 조깅을 즐기는 내 모습을. 그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단체로 체육복을 입고 뛰는데도 괜히 그런 기분이 느껴졌다. 뛰면서 생기는 몸의 열기로 인해 조금씩 느껴지는 땀, 그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다 바람 그리고 점점 안정적으로 돌아오는 호흡까지. 삼박자가 완벽한 조깅이랄까. 대충 뛰고 얼른 돌아와야지 싶었는데 다리 건너편에서 턴을 해서 돌아오는데 더 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침점호를 더 하고 싶다니)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호흡을 정리하면서 오늘 하루 시작이 참 상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두에서 봤던 100여 명의 투덜이들은 어디 가고 이렇게나 밝아진 친구들로 바뀌었는지. 투덜거릴 필요가 없어진 우리들은 사진을 남기는 것으로 아침점호를 끝낼 아쉬움을 달랬다.
아침점호라 하면 녹초가 된 나를 쉬게 하지 못하는 친구, 하루의 시작을 활기차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이라 생각했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조깅하듯 아침점호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의 시작이 달라지면 얼마나 다른 하루가 만들어질지.
이제 아침점호가 필요 없는 환경이 됐지만 기분을 위해 나만의 아침점호를 시작해 봐야겠다. 샌프란에서의 추억을 회상해 보며.
“아침점호 끝. 오전 일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