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 타고 세계일주]
“알림, 본함은 오늘 14:00경 멕시코 아카풀코항을 출항할 예정. 각 부서 출항 준비!”
“각 부서 출항 준비!!”
2박 3일의 힐링의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는 휴양의 도시 아카풀코를 떠나기 위해 오전부터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달콤한 휴식 덕분이었을까? 며칠 전만 해도 지쳐있던 우리들의 목소리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다시금 뱃놈으로서 열심히 한 번 살아보겠다는 듯 꽤나 활기찬 느낌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배가 출항할 때 우리들은 새하얀 해군 정복을 입고 현측에 도열했다. 이윽고 군함이 출항하여 부두와 멀어지기 시작했고, 아카풀코의 푸르른 바다와 넓게 펼쳐져 있는 백사장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리들은 팔을 신나게 흔들었다. 떠나는 것이, 헤어지는 것이 익숙한 우리들이라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된 곳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워 크게 크게 인사를 전했다. 더 이상 아카풀코가 보이지 않자 이렇게 아카풀코를 떠나는구나. 여긴 또 언제 와보려나, 아니 평생 다시 와 볼 수는 있을까 싶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던가? 보이지 않는 것의 대부분은 잠시 마음에 머물렀다가 기억에서도 사라지고 만다. 이렇게 아카풀코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겠지? 하며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 야, 저 배는 뭐지?
출항행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외치는 말에 시선을 옮겨보니 저 멀리 군함 1척이 보였다. 우리 순항훈련전단 군함 2척은 여기 있는데 갑자기 새로운 군함이라니? 누가 멕시코 영해로 침범해 왔나? 우리가 대신 막아줘야 하나? 별 생각들이 다 들고 있을 때 방송이 나온다.
”알림. 잠시 후 순항훈련전단-멕시코 태평양함대 간 연합기동훈련 실시할 예정. 함교-전투정보실 전투배치! “
“전투배치!”
전투배치 구령이 군함 전체에 울리자 어수선했던 배 분위기는 일순간에 바뀐다. “All station! 배치 및 준비 끝나면 보고!” 배 전체를 지휘하는 함교 당직사관(작전관)의 지시에 따라 순항훈련전단 요원들은 각자 부여받은 위치로 달려가 그동안 준비해 왔던 대로 전투를, 훈련을 준비한다. 나는 이 조건반사적으로 나오는 일사불란함이 늘 멋있다 생각했다. 작전관의 지시 한 마디로 각자 해야 하는 일을 딱딱 준비하는 모습. 배 안에서 생겨나는 다양하고 잡다한 일들을 하다가도 전투배치 지시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동안 훈련을 통해 갈고닦은 전투 준비를 하는 모습이 “우리의 존재 목적은 전투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통신관 선배 옆에 자리를 잡았다. 통신관이란 말 그대로 통신을 담당하는 장교인데 짧으면 수백 야드, 길면 수십 마일 떨어져 있는 군함들이기에 통신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이 통신이 없다면 각 군함들은 외딴섬이 될 뿐이고 해군이 가진 자랑스러운 전력들은 하나의 부대, 함대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되기에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훈련은 우리 순항훈련전단 2척과 멕시코 태평양함대 군함 1척, 즉 3척의 군함이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기동 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모두가 헤드셋을 끼고 있는 통신관 선배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었다.
- All station, Immediate execute break “turn port 2-7-0”. I say again “turn port 2-7-0”, Stand by! Execute!
(모든 국, 즉시 집행, 일제회전 좌현 270도. 다시 한번 말한다. 일제회전 좌현 270도 준비! 집행!)
- 일제회전 좌현 270도 준비! 집행!
- 집행! 키 왼편 15도, 270도 잡아!
통신 너머로 들리는 순항훈련전단장님의 지시에 따라 군함 3척은 동시에 왼편으로 타를 돌린다. 타를 돌리는 타이밍, 타를 돌리는 정도, 배의 속력 그리고 방향까지. 단 한 번도 함께 훈련하지 않았던 군함끼리 이 정도로 맞출 수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유자재로 함대가 방향을 바꾸고 대열을 조정하는 것을 보며 우리 생도들은 나도 모르게 “와”라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당직사관님이 웃으면서 한 마디 하신다. “그렇게 신기해? 니들도 항해과 장교 하면 이 정도는 다 할 수 있다. 항해과 지원해 알겠지 “ 그 말에 일부 동기들의 눈이 초롱초롱 해진 것을 보면 은근 먹혀들어간 훈련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몇 번의 기동을 마치고 서로에게 대함경례를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연합기동훈련은 끝이 났다. 함께 훈련을 해서일까? 동료애 비스무리한게 생겼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경례할 때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들은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타국의 해군들이지만 바다라는 동일한 무대에서 해군이라는 같은 배역을 맡아 살아가는 동료로서, 서로가 이 바다에서 얼마나 울고 웃으며 살아갈지 알고 있기에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래퍼로 치면 서로를 샤라웃 하는 게 아닐까? Shout out to Mexico Navy.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찐한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한구석 깊이 자리 잡는 게 아니겠냐고. 잊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불현듯 기억 속에서 떠올라 우리를 흐뭇하게 해주는 추억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만남과 헤어짐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 건지 어디선가 나타난 돌고래 떼가 점점 멀어져 가는 멕시코 군함과 우리 군함 사이를 채워준다. 이렇게 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해군들은 서로를 향한 찐한 기억을 남기고 다시금 각자의 삶의 터전을 향한다. 아디오스 아카풀코!